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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


이 말은 적어도 1915년 11월 4일까지는 유효했다. 이날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장군이 사형당했으니까.

그는 1907년 정미 의병, 즉 군대 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대에 가담했고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
조선 이북 4도의 산악 지대를 호랑이처럼 넘나들며 남에서 번쩍 북에서 번쩍
일본군을 골탕먹였던 의병장이었다.
그의 체포와 처형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은 거의 종말을 고한다.

그는 평안도 성천 출신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대한제국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여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한 자”였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지주나 부자들의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소작농들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거나 때로는 패대기도 질 줄 알았던 사내 중이 사내였다는
얘기가 된다.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 쪽으로 이사해서 화전을 부쳐먹어야 했지만 그 의협심과 용기가 어디 가겠는가.

 

 

​                                         조선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즉 일본이 한국이라는 생선을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한 마지막 가시를 제거한 것이다.
그래봐야 친위대 진위대 다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이었지만 일본은 한 치의 껄끄러움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은 서글펐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라 역적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절규하던 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한국군 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일본군에게 저항한다.
1907년 8월 2일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은 대한제국을 무골충 쯤으로 치부하던 일본과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이 반란은 지방의 진위대로 번졌고 현역 군인이 가세한 의병들은 한층 더 우수한 전투력으로 일본과
맞서게 된다. 힘 세고 용감한 농민 채응언도 그 일원이 됐다.

“을사5적과 정미7적같은 역신들의 살점을 2천만 동포가 씹어먹으리라.”고 격문에서 분노를 터뜨리던 채응언은
다른 의병집단이 일본군에 격파되거나 만주로 이동하는 동안 내내, 그리고 끝내 나라가 없어지고 일본의 일부가
된 나라에서 장장 7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다.
황해도 수안의 헌병 주재소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함경남도 안변의 주재소가 털렸고 황해도 동쪽을 두들긴
의병대가 강원도 북쪽에 불쑥 나타나 일본군을 어지럽게 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군 역시 독이 올랐다.

또 “일진회원을 보고 죽이지 않는 자는 참한다.”는 것이 채응언 의병대의 군령이었으니만큼 친일파들 또한
채응언 의병대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80원을 내걸고 채응언을 잡고자 했다.
결국 채응언은 군자금을 얻으러 가다가 현상금에 탐난 동포의 밀고로 체포된다.
하필이면 그의 고향 평안도 성천에서였다.
체포되는 와중에 격투가 벌어져 채응언과 파출소장 다나까 모두 부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채응언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진은 바로 붕대를 칭칭 감은 다나까가 마치 맹수를 포획한 듯 쇠사슬로 묶어 놓은 채응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장장 7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 채응언 의병장


그는 재판 과정에서 줄곧 태연했고 법정에서도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사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인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상고한다.
자신은 의병이고 차라리 ‘의적’이라면 모르겠으되 살인 강도의 혐의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연히 선언한 것이다.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채응언 장군은 끝까지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특히 “독립군은 만주에서 궤멸됐으니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은
만주에 없었고 박정희나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그냥 비적 따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이들의 눈으로 보면
채응언은 ‘의병’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울 것이다.

정규군의 풍채도 갖추지 못했고 무기 또한 빼앗은 것으로 싸웠으며 전투라고 해 봐야 헌병 기십 명 죽인 것이
다였는데 그걸 무슨 의병이라 부르며 그걸 어찌 전쟁이라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채응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몰랐을까.
이미 나라가 넘어간 마당에 헌병 나부랑이 몇 명 죽이고 친일파 몇 명 처단한다고 대세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의 칼바람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일본군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가며 악착같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보였을까.

어쩌면 그는 역사에, 그야말로 역사에 몸을 기댔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일본놈들이 물러가고 내 나라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 충과 효를 기억해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슬플뿐 여한이 없노라.” 당당하게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오늘날 ‘박정희는 독립군이 아니라 비적 토벌’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작자들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의 혼령이 달려들어 독립기념관의 글자를 바꿔 놓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살아났지만 의병은 죽었다."
출처 : http://www.podbbang.com/ziksir/view/1144
http://etorrent.co.kr/bbs/board.php?bo_table=humor_new&wr_id=1812048&page=1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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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102칸 짜리 강릉 선교장…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 족제비가 만들어준 부잣집

한국 최고의 부잣집 한옥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궁궐이 아닌 일반 양반집으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은 99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나친 낭비를 막기 위해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 전통 한옥을 살펴보면 99칸보다 큰 집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102칸 집이 있다. 하인들이 살던 집들까지 모두 합치면 300칸에 이르렀던 집이다.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 가장 큰 집이다. 바로 강릉의 명물 '선교장'이다. 집이 하도 커서 집 안에 문만 12개가 있을 정도다.

선교장은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 부잣집이다. 역사가 300년에 이르는 이씨 집안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그리고 이 집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큰 전통 한옥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많다. 먼저 그 이름부터 다르다.

보통 양반집들은 '~당'이나 '~각'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이 집은 유독 '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집의 경제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선교장은 '장원'이기 때문에 이름에 '장'자가 붙었다.

장원은 단순히 식구가 많고 큰 집이 아니라 한 집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것을 말한다. 선교장은 이 집의 건물과 가구 등을 전담하는 목수, 옷가지를 만드는 침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전용 전문 인력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장원 체계의 부잣집은 조선 시대 만석꾼 집안 중에서도 유례가 거의 없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집안이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된 것이다. 농토가 넓은 전라도나, 세력가들이 많았던 경상도가 아닌 산 많고 기후가 거친 강원도에서 만석꾼이 나온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한때 선교장 집 땅은 북쪽으론 주문진, 남쪽으론 울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넓은 것인지는 지도를 펴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곡창지대가 아닌 변방 강원도에서 이 집이 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실은 족제비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설마 그 족제비? 맞다. 그 족제비다.

선교장 집안을 일으켜세운 이내번이란 사람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집 지을 터를 찾아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 산 속에서 갑자기 족제비 무리를 만났다고 한다. 족제비가 떼를 이뤄 몰려가는 게 신기해 그는 족제비들을 좇아갔는데, 어느 곳에 이르더니 족제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의아해진 그가 주변을 돌아봤는데,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곳이 놀라운 명당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이다. 어떤 신기한 기운이 족제비 떼를 시켜 그에게 명당 터를 일러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명당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법도 해보인다.

좌우지간 이렇게 집터를 고른 선교장 집안은 1760년께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 집이 점점 커져 지금의 선교장으로 진화해갔다. 그럼 이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왜 진짜 부잣집으로 꼽히는지 돌아보자.

선교장은 전면이 통째로 집으로 이어져 있다. 집은 무지하게 앞면이 길고 그 앞에는 우물이 있다.
이 집 앞쪽으로 수구(水口)가 넓게 벌어져 있으므로 선교장은 집 방향을 남서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열린 수구를 비보하기 위해 긴 건물로 닫힌 형태를 만들어 풍수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입구부터 나온다. 저 사진 오른쪽으로 대문이 보인다. 이 집은 앞서 말했든 집안에 문이 12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 대문은 하나가 아니라 2개다. 집 앞쪽이 이렇게 길게 처리되고 대문이 2개가 있다는 점에서 선교장은 창덕궁 낙선재와 비슷하다.

저 평대문 말고 더 멋진 솟을대문이 그 옆쪽에 있다.

자, 여기가 가장 중요한 이 저택의 대문이다. 이 솟을대문으로는 남성들과 손님들이, 옆쪽 평대문으로는 가족들과 여성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구조를 문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보자.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인지.

들어가면 또 문이다. 이 문 너머로 사랑채 공간이 있다. 언뜻 문 사이로 봐도 넓다.

선교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자 손님을 만나는 공간인 사랑채가 그 어떤 집보다도 크고 중요했던 집이다. 그래서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채가 크다.

그 이유는 이 집안이 손님을 환대하고 교류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신경을 쓴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옥들과 가장 비교되는 부분이 사랑채가 집 한 채가 아니라 무려 3채나 된다는 점이다.

작은 두번째 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으로 간다. 정말 길다. 입구에서 보았던 그 긴 전면 건물이다. 행랑 건물인데, 행랑이 줄지어서 있어서 '줄행랑'이라 부른다.

이 무지하게 긴 행랑채는 모두 23칸이다. 우리나라 집의 규모를 세는 단위는 칸(기둥과 기둥 사이)인데, 가장 작은 집은 3칸짜리다(초가삼간 같은). 이 행랑 건물은 작은 세칸집 8채를 붙여지은 수준이다.

저 행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을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저 맞은 편 건물, 딱 보기만 해도 이상해 보인다.

한옥 건물 앞에 뭔가를 붙였다. 그 모양이 생소하다. 저건 뭘까?

 

 

저 앞에 붙인 부분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다. 마치 한옥 같지 않아 보인다. 외국 양식을 한옥에 혼합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저런 집이 아주 드물 뿐, 우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다. 가령 창덕궁 연경당의 선향재의 경우 이보다 훨씬 큰 차양을 달았다.

▲ 창덕궁 선향재. 건물 전면에 큰 차양을 달았다. 출처=문화재청 누리집 선향재말고도 서울 종로의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에도 저렇게 차양을 댄 건물이 있다.
그런데 선향재와 윤보선 고택 차양은 모두 나무로만 만들었다. 반면, 이 건물의 차양은 지붕을 구리로 했다.
구리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다. 구한말, 이 선교장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러시아 공사가 답례품으로 선물한 구리로 저 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독특한 선교장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건물이 '열화당'이다. 가족끼리 모여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이란 뜻이다.
열화당이란 이름은 아마도 미술이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낯익을 것이다. 미술전문출판사로 유명한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이 이 건물에서 따왔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선교장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열화당이 선교장의 사랑채 3종 세트의 으뜸이다. 큰사랑으로, 여기서는 손님들과 선교장 주인이 이야기도 나누고 중요한 손님이 숙식을 하고, 토론도 하고 파티도 했다.

선교장은 사랑채가 3개여서, 손님의 등급을 보고 머물 숙소를 정해줬다고 한다. 저 열화당 옆으로 중사랑이 있는데, 이 중사랑에 집사가 머물면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 내력과 학식을 테스트한 뒤 가장 뛰어난 손님이면 당연히 저 열화당으로, 중간급이면 중사랑으로, 그리고 좀 처지는 사람이면 아래사랑에 방을 내줬다.

그 아래사랑이 바로 우리가 본 길디 긴 행랑 건물이다.

23칸, 다시 봐도 길다.
일반적으로 조선 양반집에서 행랑은 하인들 숙소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는 건물이다. 그러나 선교장 행랑은 사랑채 기능을 했다. 열화당에 찾아오는 손님은 물론, 선교장이 불러 온 각종 전문인력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도대체 손님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손님 공간을 크게 마련했을까?
선교장은 손님 환대 전략으로 집안을 키웠다. 강원도는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변방이다. 이 변방에서 선교장이 명성을 유지한 것은 '문화적 소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양반들 최고의 유람 코스는 관동팔경과 금강산이었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당대의 인사들이 찾아와 선교장에 머무는 것이 코스가 되었다. 워낙 환대해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손님들은 선교장을 문화 인맥의 핵심이자, 한양 정계와 이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선교장이 얼마나 손님을 잘 치렀느냐면 절정기에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고,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사랑에 머물다가 떠날 때에는 글이나 그림을 남겨 환대에 보답했다. 지금의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들의 글씨와 그림들이 모두 이런 사랑손님들의 작품들이다. 낮은 급 손님은 때가 되면 상차림의 국과 밥의 그릇 위치를 바꿔 알아서 떠나달라고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건축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저 길고 긴 행랑은 특별한 효과를 내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선교장은 도면으로 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행랑채 건물이 뒤쪽 건물들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이다.

집을 지을 때는 직사각형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한옥들을 보면 뜻밖에도 한쪽이 비스듬한 사다리꼴 구성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 사람들은 굳이 정확하게 각을 잡고 정확한 대칭 구조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선교장에서 행랑 각도를 본채와 평행으로 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건축 전문가들은 시각적 효과 때문일 것으로 분석한다. 행랑채를 열화당 쪽으로 더 좁아지게 배치해 중사랑 쪽 마당이 너무 휑하게 넓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 이 마당에서 보면 줄행랑 건물이 비스듬한 것인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런 배치는 조선 왕실의 궁궐인 창덕궁의 인정문 앞마당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지형적 요인을 시각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인정문 앞마당에 가보면 양쪽 끝의 거리가 멀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 구획이 평행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 사랑채 건물 3개가 몰려있는 공간 뒤로는 근사한 쉼터 건물도 따로 있다.

집 뒷산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계단식으로 단을 내고 그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도 되도 숙소도 되는 집을 지었다.
일부러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로 한 지붕이 더욱 정겹다. (이 근사한 집과 아래 긴 행랑채는 여행자 숙박이 가능하다.)

그럼 이제 남자와 손님들 공간을 봤으니 여성과 가족들의 공간 안채로 갈 차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문 안에 또 문, 그리고 그 문 안에 다시 문이 보인다. 반대쪽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그 느낌이 사뭇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우뚝 올라서 앞을 굽어보는 오른쪽 건물은 안채와 붙어있는 동별당이란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판이 일품이다.

'오은고택'.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꼽혔던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여초가 선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독특하게 건물 아래 기단부에 작은 쪽문이 달렸다.

무엇에 쓰는 문일까? 수납공간?
열어보면 알게 된다.

저 문은 건물 아궁이 출입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작은 문으로 저 비좁은 아궁이 공간을 드나들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게 신분 계급 사회다. 당시 하인들에겐 저런 것이 일상이었다.

이 동별당 건물에서 안채를 바라보면 개인적으로 선교장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채 건물의 변화하는 지붕 선이다.

지형에 따라 건물과 지붕 높이가 삼단으로 꺾이는 모습이 근사하다.

이 건물이 안채다. ㄱ자로 꺾어져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는 쪽이 당연히 여성들의 대장인 안방마님의 숙소이고, 그 옆으로 꺾이는 부분에 며느리가 산다.

안방마님의 방에는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찾아보시라.

자세히 보면 방 구조가 2겹이다. 앞쪽에 넓은 방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좁은 방이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앞쪽 방이 주인인 마님 방이다. 뒤쪽은 하녀의 방이다.
하녀는 마님 옆 저 방에서 마님과 함께 잤다. 중간마다 심부름 해야 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하녀가 마님 옆에 자는 주된 이유는 마님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하녀는 곧 '인간 텔레비전'이었던 것이다. 역시 신분사회의 모습이다.

온 김에 부엌도 보자. 뒤쪽에 돌담을 만들어 부엌에서 보이는 풍경이 액자처럼 멋지다. 한옥 특유의 매력.

그런데 솥 옆에 또 까맣게 뭔가 솥은 아닌 것이 부뚜막에 콕 박혀 있다.
이 부뚜막 일체형 그릇은 물을 데우는 것이다. 불을 땔 때 저기에 물을 부어놓으면 가열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

선교장이 다른 고택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이런 크고 복합적인 구조에 있다.
선교장을 연구한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이 집의 특별함으로 '남성 공간과 여성 공간', '손님 공간과 가족 공간', '주인 공간과 하인 공간', 그리고 '산자의 공간인 생활 공간과 죽은 자의 공간인 제사 공간'이 공존하는 점을 꼽았다.

곧 선교장은 건축사전 같은 집인 동시에 조선 시대 양반 생활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건축으로 보여주는 문화사전 같은 집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건축과 조경의 조화'를 빼놓을 수 없다.

선교장과 그 앞 활래정 연못은 지금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활래정은 선교장의 독특한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좋은 '스타' 건물이다.

선교장 입구 연못 가에 지은 활래정은 뒤쪽은 연못 가장자리 땅에 기대고 있고, 앞쪽은 돌기둥에 의지해 연못 위에 올라서 있다. 줄행랑이 창덕궁의 낙선재를 닮았다면, 이 건물은 창덕궁 부용지 연못가의 부용정을 연상시킨다.

'활수(活水)가 계속 들어오는 정자'란 뜻의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곳 다실에서 연꽃이 가득한 못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궁궐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지금도 활래정에선 전통차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이 멋진 경치와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선교장은 특별한 전통 건축이다.
선교장은 독특한 건축을 활용해 집안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다른 부잣집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장을 둘러볼 때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선교장 옆에 있는 이 건물들이다.

선교장 다른 건물들에 견주면 평범한 건물들이다. 별 특징도 없다.
왼쪽 건물은 창고다. 선교장의 위세를 보여주는 건물이라고는 할 수 있다. 오른쪽 건물은 지금의 선교장 관리사무소다.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뜻깊고 소중한 곳이었다. 강원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가 여기 있었다.

선교장의 여섯 번째 주인이었던 이근우는 조선이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던 1908년 인재 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동진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여운형과 이시영 등 당대 최고의 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학생들에겐 숙식과 교복 등을 모두 무료로 지급했다.

그러나 동진학교는 3년 만에 문들 닫고 만다. 민족의식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켰기 때문이었다.

이근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전국 부자들을 모아 만든 중추원 참의를 맡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해주었지만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동진학교를 운영할 때 인연을 맺은 여운형 등을 도왔던 것이다.

그 지원 방법이 무척 흥미롭다. 이근우는 사람을 시켜 집안 사당에서 위패를 몰래 훔쳐가게 했다. 위패는 제사 지낼 때 조상의 혼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조선 시대 양반들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이근우는 이 위패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독립운동 연락책에게 돈을 건넸다고 한다.

선교장 집안의 성공 비결은 지금의 기업가들 못잖은 경영 마인드였다.

조선 후기 선교장은 당시 시대 변화를 잘 포착해 `염전 사업'으로 부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새로운 농사법으로 떠오르던 이앙법을 도입했다.

또한 '벤처 정신'도 강했다. 번 돈으로 땅을 사들이기보다는 농토 개간에 '올인'했다.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씨 집안으로선 강릉 토박이 세력들의 견제와 충돌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선교장 집안은 주변 뻘을 논밭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땅을 늘렸는데, 새로 개간한 땅은 세금이 면제되는 이점도 있었다.

선교장이 성공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최고의 방법인 '혼맥'이었다.

집안이 흥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돈을 많이 벌던, 과거에 붙어 고위 공직자가 되던 자력갱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결혼이다. 자기 능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흔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반면 결혼은 '엘리베이터'다. 훨씬 더 높이, 그리고 빨리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어서다.

선교장은 당시 조선의 세도가인 '벌열'들과 통혼을 하면서 집안 지위를 올려갔다. 그리고 대원군의 후원자가 되어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등 당대의 세도가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문화적으로 소통을 중시했던 점에서 이 집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교장을 찾은 이는 실로 많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부터 일제 강점기 몽양 여운형까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쟁쟁한 이들은 물론 문화계에서 당대의 스타들이 줄줄이 이 집을 찾아왔다.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이 집안의 재력과 위세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대신 이 멋진 건축만은 그대로 남아있다.

강릉은 묘한 곳이다. 큰 도시라 해도 나라 끝에 있어 외진 입지이지만 문화사적으로 보면 그 위상은 중요하다. 불교와 유교 두 우리 문화축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선 불교 면에서 보면 성지 오대산이 가까워 다양한 불교 유적들이 많다. 유교 면에서 보면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강릉에서 배출됐다.

문학은 또 어떤가. 조선 3대 여류 시인 중 2명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강릉 사람이다.

그러면 건축은? 아쉽게도 그리 대단한 것은 많지 않다. 특히 새로 복원한 강릉 관아의 수준은 눈뜨고 못 볼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강릉에서 꼭 봐야 할 건축은 있다. 고려시대 건물로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국보 건물 강릉 객사문과 이 선교장이다. 이 둘은 진정 강릉의 보물이다.

구본준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7939.html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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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인(東夷人)들처럼 행동하면 복(福)을 받는다.

 

 

 

 

군자불사지국( 君子不死之國)

 

 

 

- 펀 -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한민족(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합니다.

"동쪽에 사는 사람들" 이라하는 뜻입니다.

중국 후한시대에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 하는 책은,

한자의 근본 원리를 해설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문사전'으로

한자 해석에 있어서 말하자면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책인데

그 책에서 "동이(東夷)" 자를 찾아보았습니다.

( 동이(東夷)는 한민족)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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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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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하면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라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가 있다. (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한다.

참으로 연유(이유)있는 일이로다." 라는 구절이다.


(주: 위의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나라 = 고조선

공자의 나라는 중국 동해안에 있었으니 배를 타고 오면 바로 한국의 서해안.)


이제까지 우리는 동이(東夷)민족이라 하여

夷(이)자를 "오랑캐 이" 라고만 여겨왔고

동이(東夷)란 동쪽 오랑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자의 근본을 밝히는 <설문해자>를 보니

이(夷)는 "크게 어질다"는 뜻으로 되어 있고

군자불사지국(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으로 불려지고

공자께서도 중국 땅에 도가 행해지지 아니하므로 동이 (배달) 나라에 가고싶다고 하며 뗏목에 올랐다는 구절이 있다.


더구나 이것이 우리나라 책도 아니고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는 중국의 <설문해자>에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동방예의지국(동방의 예禮와 의義의 나라)>이란 말이 나온 것이며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한 전설이 있는 것이리라.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 군자의 나라가 있고 죽지 않는 백성이 있다.(有君子之國有不死民)

 

 

이라 되어 있고

[후한서 동이전(後漢書 東夷傳)]에는

-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仁而好生), 군자가 있다.(有君子)

[논어 공야장편 자한지리(公冶長篇 子漢地理)]에는

<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外 故 孔子曰 悼道不行 設文解字 欲居九夷 有以也>

즉,

"동이(東夷)는 천성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설문해자]에 나오듯이 구이(九夷)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참으로 연유(이유)있는 일이로다"

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동이민족을 다른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전사년(錢斯年)이라는 사학자는 "팔괘"를 만든 태호 복희씨가 동이(배달)민족으로

팔괘가 한자의 기본이 되었으니

한자는 동이문화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공이전(孔夷傳)에도

<동이(東夷)의 행동은 복이 내린다.>고 나와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동이(東夷)"라는 말이 "동쪽 오랑캐"로 전락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참으로 통탄할 일인 것이다. 아마도 일제와 친일사학자에

 

의해 왜곡되었지 않나 생각이든다..

이제는 다행이 열린 시대가 되어 국경을 초월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동이(배달)민족의 우수성이 밝혀지리라 본다.


- <대동이와 한자문화권> 에서 퍼서 간추림 -

 

 

 

 


《설문해자》의 동이(東夷)


(동이(東夷) = 배달민족 = 한민족)


( 설문해자 - 중국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한문사전"으로 불린다.

한문 사전 중 말하자면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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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의 동이(東夷) 원문

 


<夷>

【東方之人也 從大從弓】

各本作平也從大從弓東方之人也淺人所改耳今正
韻會正如是羊部曰 南方蠻從筮 北方狄從犬
西方羌從羊 西南人焦僥從人
蓋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從大大人也
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夏者中國之人也
從弓者肅愼氏貢 矢石 之類也
出車節南山桑柔召旻傳皆曰夷平也
此與君子如夷
有夷之行降福
孔夷傳夷易也同意夷卽易之假借也
易亦訓平
故 夷爲易也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節南山一詩中平易分釋者各依其義所近也風雨傳曰夷悅也者平之意也
皇矣傳曰夷常也者謂夷卽 之假借也凡注家云夷傷也
者謂夷卽痍之假借也周禮注夷之言尸也者謂夷卽尸之假借也尸陳也其他
訓釋皆可以類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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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설문해자경 說文解字經》段玉裁 著. 대만(臺灣) 蘭臺書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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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夷(이)] 는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대 - 위대함)' 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궁 - 활)'에서 유래하였다.


만물(모든 것)은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이(東夷)만이 대(大)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인(東夷人)의 풍속은 어질고,

어질면 장수하므로

동이(東夷)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 (君子不死之國) 가 있다.

생각컨대,

하늘은 크고 존귀하며 땅도 크고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 존귀한 것이다.

"크고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이(夷)"자의 옛 글자는 "大"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렇듯이 군자(君子)는 동이인(東夷人)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此與君子如夷]

동이인(東夷人)들처럼 행동하면 복(福)을 받는다. [有夷之行降福]

 

진리를 뜻하는 易(역 또는 이)자는 夷(이)자에서 나온 같은 뜻의 글자다. [夷卽易之假借]

 

 

동이인(東夷人)들이 진리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중국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동이(東夷)에 가고 싶다." 고 말하면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 것은 참으로 이유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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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놀라운 기록이지요.

 

한민족(배달민족)을 존경하는 중국 고대기록들은 아래 계속 됩니다.

 

 

 

 



[고조선 지도]

 

 

 


 

 

 

 

[고조선지도]

 

 


[산해경(山海經)] - (고)조선 관련 기록


( "산해경"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중국의 책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아주 유명한 책.

약 4천2백년전에 지어진 책으로 추정되고 있음.

고대사 학계에서는 산해경 모르면 말하자면 '간첩' )

 

 



"동해의 안쪽과 북해 부근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조선" 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남을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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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其人水居?人愛之]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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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동해"는 중국의 동해 즉 황해(우리의 서해)를 뜻함.

여기서의 "북해"는 황해 위쪽의 바다 즉 발해.)


 

" 군자국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는데

항상 옷을 바르게 차려 입고 관(멋진 모자)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닌다.

가축을 키우고 두 마리 큰 호랑이를 옆에 두고 부린다.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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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君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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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전》서문


후한서 - 중국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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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 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

 

故天性柔順, 易爾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故孔子欲居九夷也.
《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山海經》又曰: [不死人在交脛東 壽不死.] 吊方也.

 

《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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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 사람을 "이(夷)"라 한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의미이고,

동이인(東夷人)들은 어질고 생명 살리기를 좋아하여

마치 만물이 대지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훌륭하여 도덕(道德)이 펼쳐지기 쉬워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 - 군자가 있어 죽지 않는 나라) 라 불리워지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 = 동이(東夷) = 한국)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에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키우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호랑이)을 곁에 두고 부린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라고 하였다.

《외국도 外國圖》에 이르기를

 

 

"낭야에서 삼만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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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열전*


약 2300년 전, 공자(孔子)의 7대손 공빈(孔斌)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대의 동이(東夷)는 한(韓)민족 (배달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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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 = 고대 한국)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나라들. 합쳐서 고대 한국.)>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배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 이라 하는 도에 통한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중국의 시조라 불리는) '황제헌원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서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의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의'에 동이(고대 한국)의 '부루'께서 친히 와주셔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졌다.

동이인 '유위자'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분에게서 '중국'이라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동이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 (東方禮儀君子之國 - 동쪽에 있는 예의바르고 의(義)를 아는 군자의 나라) 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東夷)땅 (고조선)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이(東夷)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 사람들 (大國人) 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왕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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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열전 원문 한문본]

 



《 東夷列傳 全文 》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록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2006-09-08 17:50:30

내용출처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AE&sch_key=key&sch_word=주은래&seq=6188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2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저우언라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연합뉴스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제발 우리 정부가 더이상 '굴종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저우언라이 문건' 전문을 싣는다.

◀ 저우언라이 발언록. ⓒ연합뉴스

 


원문 보러가기>>>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AE&sch_key=key&sch_word=주은래&seq=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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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글 : 오소운 목사

 

 

 

▶ 들어가는 말 ◀

 

 

중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문자(文字, 소위 漢字)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이 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가

 

아시아의 동방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으로 동이족이 한(韓)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기네 조상이라고,「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네들이 역사왜곡을 한다 해도, 자기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 장개석(蔣介石)과 임어당(林語堂):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의 고향이 옛날 백제땅이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이 장개석, 가운데가 그의 부인 송미령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어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蚩尤挽歌

 

- 苗族 傳統 口傳 歌謠 -

 

- 오소운 역 -

 

 

千古奇才横空贤,천고기재 횡공현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 #40644;间。가담병론 염황간 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 군시점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석권중원 하화련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강의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영명불인 탁록패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 #40092;。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 #8212;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4) 임혜상(林惠詳) 교수 :

 

 

홍콩대학의 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5)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 :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 #8212;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 #8212;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6) 대만학자 노간(勞幹) :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7)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8212;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8)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9)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印)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모두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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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지 510주년되는 해다. 음력 10월 29일생으로서, 양력으로 

따지면 1504년 12월 5일생이다. 신사임당에 대한 이모저모를 정리해봤다. 



1. 신사임당은 딸부잣집 5자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인선. 오늘날 태어났으면
 신인선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사임당은 당호)

 

 

               [www.vav.kr]

2. 뼈대깊은 양반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아버지 신명화는 몇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으
나 낙방하고, 41세에야 겨우 진사가 됐다. 처가에서 과거 시험 뒷바라지까지 해준 모양
이다. 하지만 결과가 잘 안 나와서, 장인어른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신명화는 아예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에 내려와 살았다.  

 

[신사임당이 자란 강릉 오죽헌. 아들 이이도 이곳에서 낳았다 ]

 

3.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문학적·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 신명화
는 이 둘째 딸을 많이 아꼈다. 

4. 사임당이 19세 때 가난한 양반집 이원수라는 총각과 혼사를 맺게 했다. 사윗감을 잘
못 고른 거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는데, 사실 신명화의 속뜻은 사임당의 예술 활동을 계
속 이어나갈 수 있는 집안을 고른 것이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환경에서는, 여자가 아무
리 뛰어나도 결혼과 함께 재능을 묻어야 했다. 

5. 이원수와 사임당의 금술은 좋았을까? 그런 것 같진 않다. 이원수는 사임당을 깊이 사
랑하지 않았다. 이원수는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거듭했고, 사임당은 이 때문에 마음 고
생을 했다. 

6. 이원수가 사랑했던 여인은, 큰 아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인 권씨였다. 자유
분방하고 약간 조울증 기질이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권씨를 몹시 싫어했고
, 남편이 권씨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이원수는 사임당이 죽자, 권씨
와 결혼했다. 

 

 

 [강릉 경포대에 세워져 있는 신사임당 동상]
 

7. 이원수도 과거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답답했던 신사임당은
 10년 별거를 맹세하고 이원수에게 산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원
수는 되돌아왔고,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
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만에 과거 시험을 포기했다. 

8. 사임당은 자기가 죽어서도 재혼하지 말 것을 남편에게 청하지만, 이원수는 이런 경
우도 있다, 저런 경우도 있다는 식으로 맹맹하게 답한다. 그 대화가 동계만록에 적혀 있
다.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 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신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9. 사임당은 5남 3녀를 낳았다. 율곡 이이는 세번째 아들로서, 사임당이 33세 때 출산
했다.  

10. 이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우며 큰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를 존경했고 깊이 따랐다. 이이 뿐 아니라, 다른 아들들 모두 어머니를
 많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1. 이이는 어머니의 총명함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신사
임당이 죽고 권씨가 계모로 오자,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 이이의 정
적들은 나중에 '중이 됐다가 환속했던 놈'이라고 두고두고 조롱했다.   

12. 아래는 신사임당의 그림 '조충도'다.  

 
 
 


 

 

 

13. 당대 사람들은 사임당을 '뛰어난 여류 화가'로 바라봤다. 사임당에 유교적 '현모양
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조선 후기 송시열의 공이 컸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가 된
 '율곡 이이'를 칭송하는 과정에서 사임당을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송시열은 신사임당
 난초 그림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만약 이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신사임당이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받지 않았을 가능
성이 있다. 현모양처의 상징, 한국 여성의 표상이 된 데에는 여러 정치적 동기들이 깔려
 있었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이 후보에 오르자, 반대가 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 자녀들은 어머니를 닮아서 문예 방면에 다 재능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장녀 이매창도 어머니를 닮아 시와 그림에 능해, '작은 사임당'
이라 불렸다. 


15. 사임당은 '시월드'에 있으면서도, 친정 엄마를 많이 그리워했다. 본인 건강이 안 좋
아지고 또 남편 외도가 계속되면서 친정 어머니를 더욱 애타게 찾았다고 하다. 아래는
 1537년 친정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지은 시라고 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번 바라보니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16. 사임당은 47세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94713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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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창경궁 추녀 밑에서
소풍 나온 시민에게 발견된 오래된 돌덩이.

그 돌에 새겨진 별의 그림

'천상열차분야지도'

1464개의 별, 293개의 별자리
그 안에 펼쳐진 웅장한 우주
12개의 분야로 나눠 그려진 하늘.

조선 태조 4년(1395) 제작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

별의 밝기를 구분하고 해와 달, 오행성의 움직임
절기의 변화까지 읽을 수 있던 정교함.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조선의 천문지식이 한 장에 농축되어 있는
대단히 아름답고 예술적인 세계적 천문유산입니다."
- 나사라 / 날성천문관

하늘의 뜻을 살피며 조선을 넘어 우주로 펼쳐진 선조들의 기상입니다.

 

 

 

 

 

 

 

 

 

 

 

 

 

 

 

 

 

 

 

 

 

 

 

http://cafe.daum.net/nicedayjhs/HOgD/9?q=%C3%B5%BB%F3%BA%D0%BE%DF%BF%AD%C2%F7%C1%F6%B5%B5&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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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21/2014102100271.html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입력 : 2014.10.21 03:00 | 수정 : 2014.10.21 10:10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 첫 발견]

-"소름 돋을 정교함"
뚜껑과 몸체의 각진 부분엔 가느다란 금속선 두 줄… 넝쿨무늬 이파리가 출렁인다

-고려 나전칠기 전세계 16점
이번 전시는 日권위자가 기획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교한 자개 무늬가 돋보이는 수작."

70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을 본 전문가들의 반응이다. 팔각형 함 위에 자개로 촘촘하게 박힌 모란꽃송이가 신비스러운 광채를 발산하고 있다.

흑칠(黑漆) 바탕에 모란 무늬를 빼곡히 채웠고, 넝쿨무늬 이파리가 곡선을 이루며 출렁거린다. 뚜껑과 몸체의 각진 부분에는 가느다란 금속선 두 줄을 입혔다. 정교하고 치밀한 디테일이 고려 나전칠기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준다.

일본 아이치현 도자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조선의 공예'전 포스터에는 이 나전함 사진이 전시 대표 유물로 소개돼 있다. 본지가 입수한 전시 도록에는 이런 설명이 붙었다. "고려 14세기 후반의 작품이며 고려 말기에서 조선 시대로 가는 과도기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귀하고 뛰어난 작품이다."

 

 

 

 

 

 

팔각함과 경함(經函·불경을 담는 함) - ①일본에서 새롭게 발견된 14세기 후반의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 흑칠(黑漆) 바탕에 자개로 모란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장식했다. 뚜껑과 몸체의 각진 부분에는 가느다란 금속선 두 줄을 입혔다. ②일본 기타무라미술관 소장‘나전모란넝쿨무늬경함’과 ③그 세부 문양. 모란꽃송이와 출렁이는 넝쿨무늬가 이번에 발견된 작품의 문양과 비슷하다. /아이치현 도자미술관 도록



고려 나전칠기는 당시 외국 왕실에 보내는 '호화 선물'로 인기가 좋았다. 이미 11세기에 고려 조정이 외국 왕실에 보내는 선물 품목에 나전칠기가 있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전한다.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최상급 공예품이지만, 남아있는 실물이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6점만 확인됐다. 가장 많은 형태가 경함(經函·불경을 담는 함). 9점이 전하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기타무라미술관, 미국 보스턴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국내에는 한 점도 없었으나 지난 7월 일본에서 돌아온 국보급 나전 경함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돼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특히 팔각함이라는 독특한 기형이 주목된다.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기법과 문양은 틀림없는 고려 고유의 것인데 팔각함은 처음 보는 형태"라며 "원나라 작품에 이런 팔각함 형태가 있지만 문양은 고려 나전처럼 패턴을 그리지 않고 인물화나 풍경화를 그린 게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용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나전을 오리는 가공 방법과 문양의 세부 디테일이 고려 양식이고, 문양은 일본 기타무라미술관이 소장한 '나전모란넝쿨무늬경함'과 비슷하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일본의 나전칠기 권위자인 가와다 사다무(河田貞) 데쓰가야마대학 교수가 기획한 것. 가와다 교수는 전시가 진행 중이던 지난 9월 타계했다. 최응천 교수는 "고려 나전칠기를 가장 깊이 꿰뚫고 있는 가와다 선생이 고려 것으로 봤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고려 장인들이 중국 스타일로 만든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최 교수는 "고려사 등 문헌에는 원나라에서 고려의 나전 장인들을 보내달라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의 장인들이 원나라의 기호에 맞게 '중국식으로' 만들어서 보내준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고려 나전칠기

정연하게 구획된 문양을 그린 것이 특징. 아주 잘게 썬 1㎝ 미만의 자개 편을 조합해 엮어 무늬가 정교하고, 무늬 구성에 금속선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10/22/15763003.html?cloc=olink|article|default (중앙일보)

 

 

 

나전칠기 팔각함 첫 발견…700년만에 최초

 

입력 2014.10.22 13:08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던 나전칠기 팔각함이 700년만에 최초로 발견됐다.

한 매체는 지난 21일 “14세기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이 일본 아이치현 도자기 미술관에 열리고 있는 ‘고려·조선의 공예전’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려 나전칠기 팔각함은 모란 무늬가 촘촘히 수놓아져 정교함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공예품이다. 높이 8.0㎝, 폭 16.4㎝이며 흑칠(黑漆) 바탕에 모란넝쿨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나전칠기 팔각함은 실물이 워낙 귀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6점만이 확인됐다. 특히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팔각함은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관심을 끈다. 고려시대임을 감안하면 무려 700년만의 세상 외출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나전칠기 팔각함이 독특한 형태의 최상급이라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 중앙일보
‘나전칠기 팔각함 첫 발견’ [사진 일본 아이치현 도자기 미술관]

 


http://cafe.daum.net/hanryulove/5Qxi/12531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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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최초공개'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최초공개
임 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金 九 지시로 작성한

이덕일 역사 평론가.

출처: 월간중앙 2001년,8월호.
“월간중앙”은 1948년 백범 김 구와 임 정 계열이 지목한
숙청 대상 친일 인사들의 명단 초안을 단독입수해 공개한다.

친일파 숙청의 민족사적 임무를 띠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7,000여명의 혐의자를 조사해 이중 221명을 기소했다.
그러나 기소된 친일 인사 중 재판이 종결된 자는 불과 38인,
그나마 전원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단 1명도 없었다.

이번에 “월간중앙”이 입수한 친일파 명단은
희산 김승학이 작성한 육필 원고를 통해 밝혀졌다.
김승학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투사'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에는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육필 원고가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1948년 원고 작성 당시의 김승학의 위치와 지위에 있다.
그는 이 명단을 작성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해 구성된 ‘반민특위' 재판관과
검찰관 17인 중 12인의 명단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그가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이 육필 원고의 친일파 리스트는
‘반민특위' 친일파 명단의 초안, 또는 기초자료로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에는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백범 김 구, ‘임정파’의 판단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식민지 잔재 청산의 ‘처절한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 편집자>

 

 



2001년, 7월,12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열리고 있었다.
김승학은 일반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관심끄는 육필 친일파 명단.

이날 고인의 120세 생일을 맞이해 열린 강연회 현장에서는
김승학 선생이 직접쓴 친필 사료들 몇 점이 공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갱지에 흐릿한 붓으로 쓴
‘반민족특별재판소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사료였다.
그 뒷장에는 ‘친일파 군상’(群像)이라는 중간제목 아래
‘(1)정계·관계·실업계 인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고
친일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친일파 명단 아래에는 옛날 시골 학교에서 반장선거 때 했던 방식대로
‘정’(正)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많은 경우는 ‘正’자 셋, 즉 15부터 ‘一’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 육필 원고는 반민특위와 친일파들의 명단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숫자를 부기한 친일파 명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원고 작성 당시 김승학의 지위때문이었다. 김승학은
친필 명단 작성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원고는 김승학이 당시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단순히 개인 의사로 기록한 명단이 아니라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판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끈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견해

김승학은 1948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정치부장에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정 주도 정당이었으므로
김승학은 임정 내의 위치로 보나 한국독립당 내의 위치로 보나
당시 독립운동가 진영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등이 합당해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주류이자 임시정부의 집권당이었다.
환국 후인 1946년 4월에는 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 합당했으나
당명은 여전히 한국독립당이었고, 역시 임정이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좌우 합작과 남북협상 통일정부 수립 등의 노선을 갖고 있었으므로
1948년 5월10일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는 불참했기 때문에
의회에는 일부 무소속 외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심지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게 하는 데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시기 많은 고난을 겪었던 김승학도 1948년 3월 신탁통치 반대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정도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굴절되어 있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모습은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통탄해 마지않던 바였다.

그러나 비록 한국독립당의 선거 불참 속에 구성된 국회지만
제헌국회는 개회 벽두부터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1948년 8월5일 국회의장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金雄鎭)의원(파주. 무소속) 의원 등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의 구성안을 긴급동의해
재적 155명의 의원 중 가 105, 부 16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다음날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에 김웅진,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이 선출되었고,
8월17일에는 김웅진 의원 외 27인의 이름으로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제출돼 9월7일의 제59차 본회의에서 재적
141인 중 가 103, 부 6표로 가결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48년 9월 3일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반시킬 때가 아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폭발적 반응에 밀려
법안은 9월21일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특별재판부에 국회의원이 포함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배치되는
사법권 침해라는 일부 국무위원의 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됐다.

이렇듯 친일파 숙청 문제가 공론화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결성이 기정사실화되자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임정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단독정부, 단독국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친일파 숙청 문제까지 방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승학의 이 육필 명단이 주목받는 것은
임정측의 이런 필요에 의해 작성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정측의 이런 필요성이 아니라면
김승학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연필로 꼼꼼히 옮겨 적고,
아마도 동지들과 같이 한 것이 분명한 ‘正’표시를 부기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친일파 군상”의 육필 초고

이 육필 명단은 그냥 사장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설치 법안이 공포될 무렵인
1948년 9월, 준비했다는 듯이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삼성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발간 경위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의 편찬자는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이지만
그간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어떤 성격의 조직이고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데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베일에 가려졌던 삼성문화사의
“친일파 군상”이 김승학의 육필 명단을 기초로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책은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이는 책이 반민특위를 겨냥해 출간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인물들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받아야 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사는
당시 김승학이 임정과 한국독립당 내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로 볼 때
단순한 개인 의사가 아니라
임정측 입장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임정 측의 입장이 반영된 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당시 한독당 김구 주석은 물론
임정계열의
여러 핵심 인사와 면밀한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친일파 군상’의 초고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이 육필자료는
김구와 임정계열의 친일파 청산 의지와 방법론,
청산 대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정은 비록 단독정부와 단독국회는 거부했으나
임정이나 한독당 명의 대신 ‘민족정경문화연구소’ 명의로
반민특위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육필 명단에 친일파뿐만 아니라
이들 신상을 처리할 재판관,
검찰관의 명단까지 적어 두었다는 점 때문에 신빙성을 갖는다.




미리 예상한 반민특위 재판관, 검찰관 명단

반민특위 위원이나 재판부·검찰관 등의 명단이
“친일파 군상”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해 육필 명단에는 수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반민특위 구성원이나 특별재판관, 검찰관이 채 선정되지 않았을 때다.
육필 원고의 ‘반민법특별 재판관·검찰관’ 명단 중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金尙德)이 포함되어 있다.
부위원장 김상돈과 10명의 조사위원 명단은 누락되었으나
실제 구성된 특별재판부와 검찰부 구성원은
육필 명단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특별재판부의 재판관장 김병로와 제1재판부 재판관 오택관·홍순옥·김호정과,
제2재판부 재판장 노진설 재판관과 고평·신현기·김장렬,
제3재판부 재판장 서순영과 재판관 이춘호·최영환·최국현 등이 그들로
16명의 재판관 중 명단에 오른 인사가 12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특별검찰부의 검찰장관 권승렬과 검찰관 차장 노일환을 비롯해
검찰관 서성달·곽상훈·이의식·심상준·김웅진·서용길·이종성 등 9명의 검찰관 중
7명의 검찰관이 모두 육필 원고에 들어 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자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 군상”은 의외일 정도로 신중하다.
이 책의 범례(凡例) 1을 보자.
‘본집(本輯)에 등재된 전쟁 협력자는 1937년(소화 12) 7월,
즉 중·일 개전시부터 1945년(소화 20년) 8월15일,
즉 해방시까지 9년간 일본을 위하여 물질적·정신적 공헌자,
또는 위협에 피동되어 협력적 행동을 한 자로서 주로 세간에 발표된 자에 한함.’

이로 미뤄
임정측은 친일파 숙청이 무조건적, 보복적 차원에서 전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대상자를 중·일전쟁 이후 9년 간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이완용과 같은 초기 친일파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 친일파들은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등에서 근무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 개인 명단을 발표하지 않아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배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정은 친일파 문제가 각 정당의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이용될 것을 우려해
명단을 한정한 것처럼 보인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우려를 잘 나타내고 있다.
‘좌익정당에서는 우익정당에 친일파 반민자가 많은 것같이 선전하여 왔고,
우익정당에서는 도리어 좌익에 많음을 말하고 있음은
실로 이 문제가 정당의 선전자료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이 있다.’

이처럼 친일파 문제도 좌,우익에 의해 당리당략 차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임정측에서는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에서
‘본집에 등재될 인물 중에는 진정 협력자도 많지만
위협과 강요에 부득이하여 협력적 행동을 하게 된 자,
또는 형식적으로 협력하는 체 한 자
절대 다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반민자 문제는
민족적인 양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상명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해
이 문제가 당리당략 차원에서 접근되는 데 대해 경계하고 있다.
즉,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일파 문제가 당리당략이나 한풀이 식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민족적인 양심'으로 접근해야 할 ‘지상명제'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원칙에서 친일파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당시의 심한 박해에와 위협에도 백절불굴하고
그 절조를 고수한 애국지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직업의 지속, 재산의 보호, 신변의 안정 등을 위하여
관헌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비굴한 행동을 한 자 적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또한 그 당시 위협에 행동된 인사나 그들의 과오보다
그들의 동원을 위하여 주역할을 하였던 친일협력단체의 주요 간부 및
친일 언론기관 경영자 등 소위 친일 선두부대의 죄과가 중대한 것을
특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육필명단에 부기된 숫자의 의미.

육필 명단은
(1)정계·관계·실업계.
(2)교육계·종교계.
(3)언론계·문학계·연예계.
(4)기타 인물.
(5)거액(10만원 이상)의 국방헌금 헌납자.
(6)적극 지원병.
(7)1만원 이상 헌납자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1)은 43명 (2)는 13명 (3)은 45명 (4)는 11명 (5)는 19명 (6)은 70명이고
(7)은 모두 73명인데 17명의 명단만 밝혀놓았다.

그런데 (1) (2) (3) (4)의 범주에 드는 인물들은 이름 밑에 ‘正’자 표시가 붙어 있다.
이름 밑에 숫자가 매겨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의 면면을 보면 의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숫자가 매겨져 있는 인물은
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이광수(시인)로
이들은 모두 正자가 셋, 즉 15란 숫자가 매겨져 있다.

다음으로는 윤치호(연희전문 교장, 45년 12월 사망)와
주요한(시인)으로 13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뒤이어 김동환(시인)이 12, 고원훈(중추원 참의)·
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
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박인덕(청화여숙장)·이종린(천도교 간부)·김활란(이화여전 교장)
신흥우(목사)·유진오(교육자) 등은 9,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박흥식(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백철(문학평론가)
이성근(每新사장)·황신덕(교육자)은 6, 신태악(변호사)
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
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5 이상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다.
그러나 민족 학살을 도모한 박춘금(대의당 당수)에게
2라는 비교적 낮은 숫자가 매겨지고,
1개군(郡)에서 비행기 1대씩 헌납하자고 주장했던
유명한 문명기(조선신문 사장)에게 1의 낮은 숫자가 매겨진 것은
이름 밑의 숫자가 친일 강도에 대한 절대적 분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름 앞에 ‘가(假)’자가 부기된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은 박정형·정방오로, 반민특위가 구성될 무렵
애국지사로 자처하면서 상당한 세도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즉, 친일파이면서 애국자인 척하는 인물에게 ‘가’자를 붙인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좌절.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에 죄,
제2장에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에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
그리고 부칙 등 전문 32조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제1장 1조의 ‘죄’는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고 되어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8일 제1호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화신백화점 4층 집무실에서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위는 두번째로 해방후 자신 소유의 “대동신문”을 앞세워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일본 헌병의 앞잡이 이종형을 구속하고,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등을 지낸 이성근을 구속하는 등
온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10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했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힘입어
반민특위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친일경찰과 헌병사령부는 친일파는 남이 아니라는 듯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로 찾아가면
원용덕은 이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등 30여명의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하였다.

수배중이던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등과 함께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해 김병로·권승렬·김상덕·김상돈 등을 암살하다
백민태의 자수로 폭로되기도 하였다.

악질 친일경찰 최연과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반민특위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한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는 등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평북 고등과 사찰주임 김덕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계속했다.

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나섰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49년 5월
제1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 등 4명이 구속되고,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특위 위원 노일환과 서용길 등 13명의 의원이 구속됐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회 프락치사건은 국회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행정부의 이런 자세에 힘입은 경찰은
관제 군중을 동원해 특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1949년 6월3일에는 관제 시위대가 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난입하려 했는데,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친일경찰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그해 중부서장 윤기병 등의 지휘로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 시킨것이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습격사건을 놓고 국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 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해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런 와중에 국회 프락치사건까지 겹치자
극도로 위축된 국회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던 반민법 공소시효를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상덕 위원장 이하 전 위원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 뒤를 이어 평소 반민법에 반대해온 이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 임무는 법원과 검찰로 이관되었다.

검찰과 법원은 실형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 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재심청구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한명도 없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鼠一匹)’도 아닌
‘서무필’(鼠無匹)로 끝난 민족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 참고자료. ※

※ 정계. 관계. 실업계 인물. ※

이성환,이수우,윤치호,김연수,고원훈,신태악,조병상,여운홍,
인정식,박희도,이각종,김한경,김시권,박인덕,이정섭,김사연,
문명기,한상룡,정교원,차재정,이성근,박흥식,박춘금,안인식,
한규복,이종린,최린,최남선,박윤진,이돈화,장덕수,방응모,김석원,
김동원,가명 박정형, 가명 정방오, 김신석,손영목,고일청,차재명,
문덕상, 박상준,김오성 참고;김연수(인촌 김성수 동생),
여운홍(여운형 동생) 43명.

※ 언론계. 문학계. 연예계 인물. ※

김기진,박영희,정인택,이희적,이광수,주요한,김동환,김동인,
모윤숙,현영섭,백철,장혁주,이찬,김용제,최재서,이석훈,정인섭,
최승희(무용),오정민,김정의,박경조,김용환,이용설,홍해성,
유치진,김태진,박영호,이익,안석주,안종화,최인규,박기채,
방한준,서강백,홍양명,고승제,안함광,김억,이창수,이서구,
노천명,배상하,이영근,대조실신,송영,박순천 45명.

※ 교육계. ※

정남수(목사), 김활란(이대총장),장면(총리),허하백,
신흥우(목사),이헌구,이숙종,오긍선,양주삼(목사),유억겸,
유진오,송금선,황신덕,임국재,손정규,유각경,홍순원,고봉경,
김성수(동아일보사주).

19명 기타.
김정식,김선영,남기동,김용진,박영덕,이정수,
임영신(중앙대창설 초대 상공장관),노기환,김희영,
박휘언,이하영 11명.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조사활동 끝에 확정지었다는 친일파 99인의 명단이다.

<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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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 桐千年老恒藏曲 梅生寒不賣香>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63890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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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三井) 기념미술관 전시 도록/조선일보DB
700여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최상급 고려불화(佛畵)가 발견됐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소유하고 있던 14세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도쿄 미쓰이 기념미술관 '히가시야마 보물의 미'전에 출품되며 세상에 나온 것이다.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유물이다. 특히 달빛 아래 바위 위에서 반가좌(半跏坐)로 앉은 관음보살이 불법(佛法)을 일깨우는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는 전 세계에 약 40점만이 남아 있을 정도로 희소성이 있는 그림이다.

이 불화의 존재는 정우택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 문화재계 인사가 최근 전시 소식을 듣고 달려가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새로 발견된 그림은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 그림은 ‘가장 완벽한 미학’이라 손꼽히는 작품이다.

정우택 교수는 "다이토쿠지 수월관음도와 도상이 매우 흡사하지만 용왕 등 공양자들을 더 크게 그려 강조했고, 다이토쿠지 그림은 꽃을 물고 있는 새를 화면 왼쪽 꼭대기에 그린 반면 이 그림에선 새가 정병 아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등 약간 변형됐다"고 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다이토쿠지 그림과 이 작품은 같은 화공이 그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닮았다"며 "방금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소장품전이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탐닉해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를 꽃피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우택 교수는 "아시카가의 소장품이라는 건 당시에 이미 고려불화가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소식에 네티즌은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대단한 발견이구나”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우리 문화 수준 엄청나네” “14세기 고려 불화 발견, 일본에 이런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있을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20/2014102003337.html

존재조차 몰랐던 작품… "방금 그린듯 생생"

 

 

 

입력 : 2014.10.20 05:43

[현존 고려佛畵 160점 중 최고 걸작, 700년만에 日서 발견]

日 개인소장자가 꼭꼭 숨겼던 것, 전시소식 듣고 간 韓전문가 확인
"보존상태 정말 좋아 깜짝 놀랐다"
달밤 파도치는 바위 위 관음보살… '수월관음도'는 전세계 40여점뿐
15세기 日쇼군 집안 家寶로 전시돼

700년 동안 은둔해 있던 최상급 고려불화(佛畵)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꼭꼭 숨겨왔던 14세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도쿄 미쓰이 기념미술관 '히가시야마 보물의 미'전에 출품된 것. 작품을 실제 본 복수의 문화재계 인사들은 "현존 최고(最高)의 고려불화를 능가하는 걸작이 나타났다" "보존 상태가 정말 좋아서 깜짝 놀랐다"며 흥분하고 있다.

이 불화의 존재는 정우택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 문화재계 인사가 최근 전시 소식을 듣고 달려가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6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한국 불교미술의 백미다. 이 중 수월관음도는 달빛 아래 바위 위에 반가좌(半跏坐)로 앉은 관음보살이 진리를 찾는 공양자들에게 불법(佛法)을 일깨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전 세계에 40여 점이 남아 있다.

새로 발견된 그림은 가장 완벽한 미학이라 꼽히는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와 매우 흡사하다. 달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 바위에 앉은 관음보살이 진리를 찾는 용왕·귀인들의 무리를 맞고 있다. 관음보살 앞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이 있고, 정병 아래에 새 한 마리를 그렸다. 거북 등껍질·연꽃무늬를 금니(金泥·금가루)로 그린 분홍 치마, 우아한 곡선으로 포개진 흰색 베일 자락…. 세밀하고 정교한 선과 선명한 색감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새로 발견된 수월관음도의 왼쪽 아랫부분을 확대한 것(오른쪽). 관음보살의 발치에서 남녀 무리가 공양하고 있다.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와 흡사하지만 이 공양자들을 더 크게 그렸다. /미쓰이(三井) 기념미술관 전시 도록

특이한 것은 화면 왼쪽 하단에 보이는 공양자들. 관음보살의 발치에서 남녀 무리가 공양하고 있으며, 반인반수의 괴수들이 큰 향로와 쟁반에 보주(寶珠)를 담아서 지고 간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의상대사의 낙산(洛山) 설화를 형상화한 것. 정우택 교수는 "다이토쿠지 수월관음도와 도상이 매우 흡사하지만 용왕 등 공양자들을 더 크게 그려 강조했고, 다이토쿠지 그림은 꽃을 물고 있는 새를 화면 왼쪽 꼭대기에 그린 반면 이 그림에선 새가 정병 아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등 약간 변형됐다"고 했다.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다이토쿠지 그림과 이 작품은 같은 화공이 그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닮았다"며 "방금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시카가(足利) 집안에서 나왔다는 내력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소장품전이다. 본지가 입수한 전시 도록에는 "옛 표구에 '아시카가 장군이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의 사찰인 곤고산마이인(金剛三昧院)에 기증했다'고 쓰여 있다"고 적혀 있다.

아시카가는 건축과 예술에 탐닉해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를 꽃피운 인물. 당대의 이름난 컬렉터로 높은 감식안을 갖고 동아시아 최고의 걸작들을 모았다. 다음 달 24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에는 북송 황제 휘종(徽宗)이 그린 새 그림을 비롯해 명품이 쏟아져 나왔다. 정우택 교수는 "아시카가의 소장품이라는 건 당시에 이미 고려불화가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고려佛畵 최고 걸작 日서 발견2014.10.20 (월)

 

http://cafe.daum.net/hanryulove/5ChS/64290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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