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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황금 신발과 금동 왕관은 백제와 신라 판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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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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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11:35

0.3mm의 예술 한국문화2014.12.05 11:35




그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감은사지,

 

높이 27cm 외벽에 조각된 정교한 사천왕상.

 

그 속에 들어 있는 눈부신 조형물과 작은 연꽃 함.

 

그 안에 담긴 호리병 모양의 사리함과 화려한 뚜껑.

 

0.3mm 금 알갱이 791개로 정교하게

 

담아낸 놀라운 세공기술.

 

 

 

천삼백 년 전 금속의 성질을 이해하고

 

예술로 승화시킨 신라문화의 자부심.

 

 

 

감은사(感恩寺) 사리함(舍利函)

 

섬세한 손기술이 만들어낸 찬란한 시대의 걸작품입니다.

 

 

 

 

 

 

 

 

 

 

 

 

 

 

 

 

 

 

 

 

 

 

 

 

 

 

 

 

 

 

 

 

 

 

 

 

 

 

 

 

 

 

 

 

http://cafe.daum.net/hanry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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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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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00:49

조선시대의 도개교 한국문화2014.12.05 00:49




출처 : 북새선은도 [北塞宣恩圖]. 조선 중기의 화원 한시각(韓時覺 : 1621~?)이 그린 행사도. 비단 바탕에 채색.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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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22:31

조선시대 남자 & 여자들의 모자 한국문화2014.12.02 22:31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88143

 

 

 

 



 

 

 

 

 

출처 트위터 UFO님
https://twitter.com/spacewolfy_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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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12:28

도서정가제 한국문화2014.11.25 12:28




조선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서점(書店)의 개설여부이다.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로서 서점이 흥성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개국 140여년이 지난 중종 24년(1529)까지도 서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서점 설치에 큰 관심을 가진 인물이 어득강(魚得江)이었다. 중종 17년(1522) 사헌부 장령 어득강은 "중국에는 서사(書肆ㆍ서점)가 있으니 한양에도 서사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길 것"이라면서 서사 설치를 주장했다.

 

 

 

 

 

서사(書肆)란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준말로서 오늘날의 서점(書店)이다. 중국처럼 조선에도 서점을 설치하자는 건의였다. 중종은 "지난 기묘년(1519)에 이미 절목(節目ㆍ법이나 조례)을 마련했다"면서 아직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해당 관청에 묻겠다고 답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14년(1519) 7월조에는 실제로 "경성에 서사를 설치했다"는 구절이 있으니 이때 서점이 설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광조 등이 피화(被禍)당한 기묘사화 이후 다시 없어졌는지 어득강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던 중종 24년 5월 다시 서점 설치를 주장했다. 어득강은 "세가(世家)나 대족(大族)들 중에는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서책도 혹 있고 하사(下賜)받은 서책도 있지만 거꾸로 쓸모없는 책도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서점을 세운다면 팔고 싶은 사람은 팔고, 사고 싶은 사람은 살 것이므로, 유생들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팔아 다른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됩니다"(중종실록 24년 5월 26일)라고 주장했다. 어득강은 조선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책을 파는 것을 그르게 여겨서 팔지 않으려 한다면서, "그러나 높이 쌓아놓기만 하고 읽지 않아서 좀만 먹는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중종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도 책이 없어서 독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내 생각에는 서점을 설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찬성했다. 임금까지 서점 설치를 찬성했지만 이때도 설립은 실패했다. 어득강의 건의 당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심정(沈貞), 우의정 이행(李荇)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조선 풍속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유였다.

서점이 없다보니 조선의 책값은 크게 비쌌다. 어득강의 말에 따르면 대학(大學)ㆍ중용(中庸)의 가격이 상면포(常綿布) 3, 4필에 달한다는 것이다. 약 30여 년 후인 명종 6년(1551) 5월 26일 사헌부에서 "우리나라에는 백가지 물건을 다 시전(市廛ㆍ시내 가게)에서 매매하는데 유독 서적 파는 곳만 없다"면서 서점 설치를 주장했다. 그런데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날 사헌부는 스스로 '서사(書肆)의 법', 즉 서점설치법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아뢴 것이 아니라 중종 때 만들었다가 시행하지 않았다면서 번거롭게 다시 논의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 철회했다. 송사(宋史) '여조겸(呂祖謙) 열전'에 이미 서점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에는 일찍부터 서점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서점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서적 구매에 대한 수요가 꾸준했으므로 공급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책쾌(冊?)라는 직업이 생겼는데, 쾌(?)는 거간이란 뜻이다. 그런데 조선 영조 47년(1771) 청나라에서 들여온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유통시키다가 책쾌(冊?) 이희천(李羲天), 배경도(裵景度) 등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인(朱璘)이 지은 명기집략은 조선 왕실의 선원(璿源ㆍ왕실 족보) 계보를 왜곡한 책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하고 인조에 대해서도 그 계보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종이 되어 흑산도로 유배 갔으니 역사상 최대의 서적상 탄압사건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서적에 대한 수요는 꾸준해서 전문적으로 책을 필사하는 직업이 생기고 이런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생겨났다. 그리고 필사만으로 수요를 대지 못하자 민간에서 목판으로 각서(刻書)해서 민간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들이 생겼는데, 이를 가게 방(坊)자를 써서 방각본(坊刻本) 서적이라고 한다. 방각본 서적은 일찍부터 유통되었는데 현재 고사촬요(攷事撮要) 마지막 장의 간기(刊記)에 '만력(萬曆) 4년(1576ㆍ선조 9년) 7월'에 발행했다면서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二第里)에 사는 하한수(河漢水)의 집에서 각판했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시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고사촬요는 명종 9년(1554)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불과 20여년 후에 방각본이 나온 데서 지식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1월 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있다. 침체된 출판시장에 대한 출판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는데,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점이 있으면 보완해가면서 대한민국을 지식강국으로 만드는 견인차가 될 수 있을까 주목된다.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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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9 00:38

[한글 철학] 세종 한글의 비밀 한국문화2014.11.19 00:38




 

 

 

 

 

한글은 참 아름다운 글자다.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의 모더니즘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붓으로 글씨를 썼다. 그런데 붓으로 글씨를 쓰면 45도 각도가 나온다. 궁서체가 된다. 한자의 삐침과 같다.

 

 

이런 주장은 어떤 일본인 학자가 처음 거론했다고 하는데, 왜 세종은 붓글씨체로 하지 않고 네모 반듯한 글자를 만들었을까? 사실 붓으로 딱 이렇게 쓰기 어렵다. 안 써진다. 동그라미도 정원보다 타원이 그리기 쉽다.

 

 

 

 

 

 

 

파스파문자만 봐도 붓으로 쓴게 45도 각도가 많다. 그럼 왜 세종은 자연스럽게 붓으로 가지 않고, 파스파문자처럼 시원시원하게 초서로 날려쓰지 않고, 족보에 없는 독특한 글자를 만들었을까? 쓰기도 불편하게 말이다.

 

 

일본인 학자는 농부가 모래에 막대기로 그릴 수 있게 할 요량으로 그랬다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글자가 45도로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팔 각도가 45도이기 때문이다. 영어도 알파벳이 필기체는 45도가 많다.

 

 

W, Y, K, A, X, Z, V, M, 에 빗금이 들어가 있다. 붓과 상관없이 45도가 자연스러운 형태이며 빗금은 긋기 쉽고 수평선은 긋기 어렵다. 팔꿈치를 콤파스의 축으로 삼고 팔을 움직이면 자연히 45도 각도의 빗금이 된다.

 

 

세종의 글자 디자인은 인체구조의 자연스러움을 따르지 않았다. 쓰기 불편한 형태다. 붓에도 맞지 않고 모래판에 막대기로 그어도 맞지 않다. 단 보기가 좋다. 그런데 모더니즘 양식이다. 옛날 양식으로는 보기에 좋지 않다.

 

 

무엇인가? 필자가 노상 디자인을 거론하는게 모더니즘 양식이다. 왜 모더니즘인가? 옛날에는 글자 한 자 안에, 건물 한 채 안에, 옷 한 벌 안에, 자동차 한 대 안에 기승전결을 다 넣으려고 했다. 자연히 지붕은 뾰족뾰족하게 된다.

 

 

자연히 옷은 울긋불긋하게 된다. 자연히 글자는 석봉체가 된다. 그런데 추사선생 만은 오직 특별하게 한글체를 모방하고 있다. 추사선생의 일부 글씨는 석봉체와 달리 한글 디자인을 연상하게 한다. 추사는 왜 한글을 따랐나?

 

 

 

 

 

 

 

 

 

45도 빗금을 자제한 추사의 예서. 자세히 보면 글자의 균형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보기에 편한 글자는 한석봉 글씨다. 균형을 딱딱 맞춘다. 그래서 명필이다.

 

 

 

 

 

 

 

 

 

한석봉 글씨는 글자 안에 완벽한 균형이 있다. 그 균형은 45도 빗금에 의해 달성된다. 그런데 틀렸다. 어떤 균형은 다른 균형을 방해한다. 동적균형은 불균형의 균형이다. 한석봉의 균형은 정적균형이고 추사의 균형은 동적균형이다.

 

◎ 세종은 한글창제에 주역의 음양론을 적용했다.

 

◎ 음양의 조화개념은 외부환경과의 결합가능성을 함의한다.

 

한자는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고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야 완성된다.

◎ 세종은 또다른 결합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모더니즘 양식을 적용했다.

 

◎ 디자인은 내적 완결성보다 외부환경과의 결합성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무엇인가? 세종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적용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오행이론은 중국의 사성을 연구하는데 적용했고 한글의 제자원리는 음양론이 핵심이다. 음양은 결합이다. 요소간의 결합성을 높이는데 주의하는게 모더니즘 양식이다.

 

 

 

건물은 지붕을 뾰족하게 하고, 옷은 현란하게 하고 하는 식으로 내부적인 균형을 따라가면 외부와의 결합성이 떨어진다. 한글은 세종이 음양론을 따라 만들었으므로 내부적인 균형보다 외부와의 균형을 추구했다. 그것은 오히려 불균형이다.

 

 

 

한글의 'ㄱ'은 불균형한 글자다. 균형을 맞추려면 궁서체로 비스듬히 써줘야 한다. '가'의 ㄱ은 45도로 비스듬하다. 그게 더 쓰기 편하고 꽉 차서 보기도 좋다. 그런데 세종의 'ㄱ'은 왼쪽 아래가 비어서 불균형이다. 위태롭다. 불편하다.

 

 

 

'ㅏ'도 불균형이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을 합치고, 글자와 글자를 합치면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자모 하나, 글자 한 자는 불균형이나 쓸수록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모더니즘 양식이 외부 환경과의 결합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한글 뿐 아니라 현대의 디자인은 모더니즘을 따라야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외부와의 결합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음양론이다. 글자로 이렇게 기분을 내면 보기도 좋고 쓰기도 편한데 디자인이 안 된다. 영어도 필기체는 디자인이 안 된다.

 

 

 

글자든, 옷이든, 집이든, 자동차든 외부와의 결합성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집은 보기좋은 집도 아니고, 살기편한 집도 아니고, 외부의 손님이 방문하고 싶은 집이다. 집을 너무 으리으리하게 지으면 안 된다.

 

 

 

손님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결합성을 높이려면 심플하게 가야 한다. 세종의 한글 디자인은 음양론을 적용했기 때문에 붓글씨 모양과 다르게 된 것이다. 마치 600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한듯 하다. '현대'라는 21세기 시대개념과 맞다.

 

 

 

옷을 입어도 자기만족적인 옷은 곤란하다. 옷 한 벌 안에 기승전결이 다 갖추어지면 안 된다.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각기 다른 옷을 입은 다섯 명이 모여야 하나의 그림이 나와주는 그런 옷이어야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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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흰 색인 이유는 다른 사물과의 결합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너무 균형을 맞추려 해도 안 되고 너무 내부를 꽉 채우려 해도 안 됩니다. 비움으로써 끌어당기게 해야 합니다. 옷이 너무 화려하면 커플티가 안 되는 이치입니다. 음식도 단순 담백해야 궁합이 잘 맞습니다.

 

 

 

 

 

 

 

 

 

 

 

 

출처 :구조론 연구소 원문보기글쓴이 : 큰그랑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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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2)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2001년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대가야 최후의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편의 장면.

(전편에 이어 계속)
領土국가로의 발전

 

 

고령읍 반운리에서 발굴된 半路國 시대의 굽다리 쇠뿔 손잡이 항아리. 높이 40.5cm. 계명大 소장.
「日本書紀」는 「任那」라는 말을 가야(加耶·加倻·伽耶·伽倻·加羅)諸國 전체를 가르키는 용어로 왜곡하고 있다. 加耶諸國이라는 것은 백제와 신라에 통합되지 않고 옛 弁韓 지역에 자립성을 보유한 채 할거하던 小國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임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임나는 가야제국 중 하나인 金官國(금관국: 駕洛國)의 별칭이었다. 금관국과 安羅國(안라국: 지금의 경남 함안군) 등 남부 가야제국은 倭와 鐵鋌(철정)의 교역 등에 의해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大加耶가 가야 諸國(제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과 관계 깊은 사건은 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의 경자년(서기 400년) 남정이었다.

가야-倭(왜) 연합군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린 신라의 내물왕은 광개토왕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낙동강 방면으로 남진시켰다. 당시 동북아 세계의 최강인 고구려군은 가야-왜 연합군을 강타해 신라 國都(국도) 서라벌의 애움을 풀면서 낙동강 하류 유역까지 추격전을 감행했다.

고구려의 출병 목적은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백제를 배후에서 압박·고립시키고, 왜군의 진출을 봉쇄함으로써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락국)는 가야제국 내의 지도적 위치에서 추락했다. 금관가야의 대성동고분군에서 王級(왕급) 무덤이 4세기 말까지 축조되다가 5세기 이후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대가야의 금귀고리. 지산동 45-1호 석실. 길이 6.9cm. 경주박물관 소장.
이로써 큰 타격을 입은 금관가야의 잔여세력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 산간지대로 흩어지거나 일본 규슈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 冶爐(야로)의 철과 기름진 농토를 기반으로 서서히 성장해 가던 대가야가 도약의 轉機(전기)를 맞았다. 금관가야 세력의 일부가 고령 지역에 유입됨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교역과 제철 지식이 전수되어 국력이 급성장해 「대가야」를 일컫게 된 것이다.

5세기 대가야의 성장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이 금동관은 판 모양의 솟은 장식 1매를 이마 쪽 정면에 배치한 光背形(광배형)이며, 형태상으로 신라의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새날개 모양(鳥翼形) 장식과 달리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이다. 이런 금동관을 만들고 무덤에 부장시켰다는 것이 이미 대가야가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5세기 초엽 이후 대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서서히 외부로 전파되기 시작해 5세기 중엽부터는 합천댐 상류 지역인 반계제 일대를 지나 거창·함양을 거친 후 전북 남원까지 미치고 있었다.

김세기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는 5세기 후반부터 이진아시 王系로 왕위가 세습되고, 왕족이나 왕비족 계통의 旱岐(한기)층과 대왕 직속의 上首位·二首位 등으로 분화된 관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고령·합천·의령·거창·함양·산청·하동을 잇는 권역을 직접지배 지역으로, 진주와 남원의 아영·운봉 지역을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직접지배 지역은 2부체제로 편제해 상부는 원래의 가라 영역인 고령 지역을 상부로 하고, 나머지 지역을 하부로 편제했다. 상부는 연조리 왕궁을 중심으로 上加羅都(상가라도)가 되고, 하부는 玉田(합천군 옥전면) 성산리를 下加羅都(하가라도)라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倭王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下位

 

 

대가야의 철제 투구. 챙이 달린 것이 특색이다. 높이 19.0cm. 지산동 1-3호 출토, 영남문화재연구원 소장.
442년, 대가야는 금관국 등 남부 가야지역의 세력과 연합한 倭(왜)의 침략을 받자 백제와 연합해 대항했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도 계속되어 475년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漢山城(한산성)을 공략당한 백제는 개로왕이 참살됨으로써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이때 신라는 원군 1만 명을 북상시켜 구원에 나섰지만, 이미 백제의 都城(도성)이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로써 漢城백제 시대가 끝나고 公州로 피란한 文周王(문주왕)에 의해 熊津百濟(웅진백제) 시대가 개막된다.

이것은 백제와 동맹관계이던 대가야에는 위기였던 동시에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굳히는 기회이기도 했다. 479년, 「가라국왕 荷知(하지)」는 중국 남조의 濟에 사신을 파견해 「輔國將軍(보국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보국장군이란 칭호는 3품 관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약 50년간 대가야는 領土國家(영토국가)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렸다. 남조의 濟에서 고구려왕이 받았던 장군호는 驃騎大將軍(표기대장군: 480년), 왜왕 武는 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 479년)이었고, 502년 남조의 梁으로부터 백제왕은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 왜왕은 征東將軍이란 將軍號(장군호)를 받았다(신라는 南朝에 조공하지 않았다).

장군호의 순위는 驃騎大將軍→표기장군→車騎大將軍(거기대장군)→거기장군→征東대장군→정동장군→鎭東대장군→진동장군→安東대장군→안동장군의 순이다. 여기서 필자가 굳이 「非行天子가 횡행하던 하루살이 정권」의 남조 왕조에서 부여한 장군호까지 들먹인 데엔 까닭이 있다.

明治 이래 일본의 학자들이 왜왕 武가 478년 남조의 宋으로부터 받은 「使持節(사지절), 都督(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 諸軍事(제군사), 安東大將軍, 왜왕」이라는 칭호를 소위 任那日本府說(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이 칭호에서 「使持節」, 「都督… 諸軍事」는 군사지배권에 관한 것이다. 군령위반자에 대한 처벌에 관련한 「사지절」은 使持節·持節·假持節(가지절)이라고 하는 3등급 중 최상위이며, 황제의 군사대권의 위임에 관한 도독도 도독·督·監의 3등급 중 최상위에 해당한다. 이 군사지배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 신라·가라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秦韓(진한)은 辰韓, 慕韓(모한)은 馬韓인 것으로, 신라와 백제에 의해 이미 병합된 지역이거나 아직 통합되지 않은 지역이다.

약 250년간 다섯 개 왕조가 뒤바뀐 南朝 시기에 주변국의 왕들에게 부여한 칭호를 검토한 사카모토 요시다네(坂元義種)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칭호에 기재된 지역명은 반드시 실제로 군사지배가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都督河西諸軍事(도독하서제군사)」의 칭호를 보면, 423~444년에 걸쳐 河西王에게 부여되었지만, 동시에 432~520년에는 土谷渾王(토욕혼왕)에게, 다시 476~505년에는 宕昌王(탕창왕)에게도 수여되었다.

칭호는 기본적으로 신청자의 희망대로 부여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멸망당하는 바로 그해의 남조 宋으로부터 받은 왜왕 武의 칭호에 국제적 信認度(신인도)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장군호에 있어서도 왜왕 武는 남조 宋으로부터 安東大將軍, 1년 후인 479년 濟로부터 鎭東大將軍, 502년에는 征東將軍을 받아 한 단계씩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왕은 같은 시기의 고구려왕보다는 몇 단계나 낮아 비교의 대상이 아니고, 백제왕보다도 항상 1~2등급 아래에 랭크되었다.



「任那 부흥회의」의 주도국은 百濟

 

 

대가야의 토기. 박물관 고장은 뚜껑 있는 긴 목 항아리. 대가야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이 시기에 대가야는 어떤 외교를 구사했던가. 漢城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가 남하의 압력을 강화해 신라와의 대립이 심화되면 대가야국은 신라를 구원해 고구려와 싸우는 등 독자외교를 전개하면서 주변 諸소국과의 동맹을 진행시켰다.

嘉悉王(가실왕)은 12현의 가야금을 만든 우륵에게 12曲을 짓게 했다. 이 12곡은 여러 小國의 노래를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며, 대가야연맹의 집회 때 연주된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의 정세는 크게 요동친다. 신라에서는 500년 智證王(지증왕), 514년 법흥왕이 즉위해 급속한 발전을 이끈다. 한산성을 잃은 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겨 부흥한 백제는 501년 무령왕이 즉위해 아직 자립성을 보지하고 있던 榮山江(영산강) 유역 지방에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513년 가야 서부에 진출해 己汶(기문: 전북 남원) 帶沙(대사: 경남 하동)를 점령했다.

이러한 백제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대가야의 異腦王(이뇌왕)은 522년 신라와의 연휴를 꾀해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신라는 북부의 대가야와 결혼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남부의 금관가야 등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위기에 빠진 금관가야 등 남부 가야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왜는 군대를 파견하려고 했지만, 527년 츠쿠시(筑紫: 北규슈)의 國造(쿠니노미얏코: 지방장관) 이와이(磐井)가 古代일본 최대의 반란을 일으켜 왜군의 한반도 출병을 저지했다. 이와이는 加羅 출신의 親신라계 호족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冠帽. 높이 19.1cm. 합천군 봉산면 반계제 가A호 출토, 중앙박물관 소장.
529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는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한편 이와이의 반란을 진압한 왜는 오미노케노(近江毛野)를 장군으로 삼은 원정군을 파견, 安羅國(안라국:경남 함안)에 주둔시켰다. 安羅는 다시 백제에도 출병을 요청해 백제군도 진주했다.

그러나 532년, 드디어 금관가야는 仇亥王(구해왕)이 항복해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신라와의 결혼동맹이 깨져 경계심을 갖게 된 대가야는 安羅 등 남부 가야제국 및 백제·왜 등과의 연휴를 강화했다.

이 대목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실은 「日本書紀」에도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보다 8년 전에 저술된 「古事記(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日本」이라는 호칭도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倭府」, 「倭臣」 따위였을 것이다.

그것의 실상은 安羅에 주둔하는 오미노케노 및 그에 부수된 使臣 등을 가리키며, 그 어떤 경우에도 장기에 걸쳐 식민지 지배기관일 수는 없다. 이것을 짐짓 영속적인 지배기관인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日本書紀」에 소위 「임나일본부」의 활동으로서 기록된 것이 541년 및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任那부흥회의」이지만, 이 회의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열린 것으로 이니셔티브를 행사한 것은 물론 백제였다.



멸망에 이르는 길

 

 

舊지산동 39호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고리칼(環頭大刀: 길이 30.3cm). 중앙박물관 소장.

가야를 먹으려 했던 상황은 백제와 신라의 경쟁으로 좁혀지지만, 한동안 그것이 표면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북방으로부터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551년,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진세를 꺾고 한반도 중부지역으로부터 고구려를 몰아 냈다. 이때 백제는 475년 이래 고구려에 빼앗겼던 옛 수도 한산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6개郡을 탈환했고,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상류 10개郡을 획득했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古代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한강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와 같은 대결을 예상한 백제의 聖王(성왕)은 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의 동맹관계를 심화시켰다. 신라의 팽창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가야도 백제와의 동맹정책을 굳혔다.

433년 이래 120년간 지속되어 오던 신라-백제의 對고구려 동맹을 먼저 깬 것은 신라였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한강 하류 6개郡을 급습해 횡탈했다.

백제는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백제 聖王은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일단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백제군과 고구려군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聖王이 신라를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眞興王(진흥왕) 시대의 신라군은 백제군 단독으로서는 승전을 기대할 수 없을 만한 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백제 聖王의 책략도 녹록지 않았다. 「三國史記」 성왕 31년(553) 겨울 10월 조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과 거의 동시에 聖王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보내고 있다. 비수를 숨긴 위장평화 공세라 할 만하다.

554년, 백제-대가야-왜 연합군과 신라군이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군)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신라 정벌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왕자 餘昌이 진중에서 갑자기 병을 얻었다. 聖王은 아들을 걱정하여 불과 50騎를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관산성으로 달려가다가 중도에서 신라의 복병에 생포되어 참수당하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대가야-왜 연합군 2만9600명이 참살당했다. 왕자 餘昌과 장수 몇 명만이 한 가닥 혈로를 뚫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왕자 餘昌은 백제 25대 威德王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승전한 신라는 대가야에의 공격을 본격화했다. 드디어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대가야와 연합했던 여러 소국도 병합했다.



일본 古代史의 골격은 곧 加耶史

 

 

「大王」이라 쓰인 뚜껑 있는 대가야의 긴 목 항아리. 높이 19.6cm. 충남大 소장.

6세기 중엽까지의 일본 古代史에서 加耶史가 빠지면 空虛(공허)하다. 그런 만큼 失傳(실전)된 가야사는 일본 史書의 비판적 검토로 일부의 복원이 가능하다.

일본의 最古 역사서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神代篇(신대편)에 등장하는 「일본 열도 창조의 女神(여신)」은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이다. 「일본 신화 속의 最高神 아마데라스(오미카미)를 비롯한 수십 명의 神들이 머물렀다는 곳이 高天原(고천원: 다카마노하라)이다.

高天原이 일본 땅의 어디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인에게 何等(하등)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원로 학자가 「高天原은 경상북도 高靈」이라는 논문과 답사기를 썼다면 관심거리이다.

고령을 高天原으로 比定(비정)한 츠쿠바(筑波) 대학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 교수의 논문 「高天原의 故地」 일부를 요약해 소개한다.

< 天孫이 高天原을 떠나 (규슈로) 남하한 것은 대가야 성립 이전인 기원 1~2세기경의 일인 것으로 본다. 天孫 일행은 적지않은 인원을 거느린 조직이었을 것인 만큼 당시 상황으론 舟行(주행)이 가장 안전하고(他집단으로 습격받는 일이 적고), 또한 집단으로 이동 가능한 방법이었을 터이다. 따라서 天孫 일행은 배를 타고 낙동강 하류로 내려와 여기서 海路(해로)로 남하했을 것이다. 이어 가사사노미사키(笠沙御前)를 목표로 항행해, 그 곶(岬)이 바라보이는 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대가야의 그릇받침. 지산동 30호 출토.
기원 1~3세기의 한반도는 三韓시대였다. 당시 고령 지역에 있었던 가야系小國의 이름은 半路國(반로국)이었다.

「天孫」 니니기(노미코토)가 반로국에서 출항할 때 아마데라스는 거울·곡옥·검 등 소위 「3종의 神器(신기)」를 주면서 『아시하라(葦原)의 땅은 나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할 땅이다. 나의 자손이여, 어서 가서 잘 다스려라. 그곳의 運은 하늘과 땅이 붙을 때까지 융성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면 왜 니니기 일행은 한반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北규슈에 상륙하지 않고 굳이 南部 규슈까지 내려가 상륙했을까? 원로 언어·역사학자 朴炳植옹은 『北규슈에는 「天孫」 니니기보다 먼저 도래한 가야족들이 이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사사노미사키의 뾰족한 곳이 바로 보이는 아다나가야(吾田長屋)에 배가 닿자 니니기는 모래밭에 폴짝 뛰어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제1성을 올렸다고 「古事記」에 기록되어 있다.

< 이곳은 가라구니(韓國)와 마주보고, 가사사(笠沙)의 뾰족한 곳이 바로 보이며, 아침 해가 直刺(직자)하고, 저녁 해가 끝까지 비추는 곳이어서 매우 좋은 곳이다>



일본 황실의 고향을 둘러싼 양론-고령說과 김해說

 

 

고령읍 가야大 구내에 건립된 日本天皇의 고향을 밝히는 石碑「高天原故地」.

일본 천황가의 出自(출자)가 가야임은 韓·日 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東京大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그의 「騎馬民族 日本征服說(기마민족 일본정복설)」에서 천황가의 先祖(선조)가 夫餘系(부여계)라고 했지만, 실은 가야 출신임을 의식하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高靈 출신」과 「金海 출신」으로 엇갈려 있다.

首露王을 시조로 삼는 「김해김씨 世譜(세보)」에 의하면 『거등왕 원년 기묘년(199년)에 왕자 仙이 세상이 쇠하는 것을 보고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乘雲離去)』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일제시대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해김씨 世譜」의 반포를 금지시켰다. 역사가 故 千寬宇(천관우) 선생은 김해 지역 주민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은 한국 측 자료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김해김씨 璿源譜略(1914년 金龍奎편)」은 큰 시사를 준다고 지적했다.

< 『수로왕과 왕비 許씨의 사이에 10子가 있었다. 장자는 태자(居登王)요, 二子는 왕후의 姓을 따라 許씨가 되고 七子는 厭世上界(염세상계)하고…. 居登王(거등왕)의 아들 仙은 塵世(진세)가 쇠함을 보고 神女와 함께 乘雲離去하였다』

이 세보에서 이와 같은 전승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으나 大姓(대성)인 김해김씨들이 이 전승을 조작할 까닭이 없을 것이고 보면 이 전승은 오랜 유래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전승에서 나오는 厭世上界, 乘雲離去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본 천손강림 설화가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설화와 놀랍게도 비슷하다. 니니기가 구름을 헤치고 내린 곳은 쓰쿠시의 쿠지후루(혹은 소호리)인데, 그 자손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황족이다>

그러나 마부치 교수는 두 번의 답사를 통해 니니기의 出自가 고령임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 나처럼 간토(關東) 평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니니기가 상륙한) 평야를 보고 그처럼 감탄하지 않았을 것이다(니니기는 「아침해가 바로 쪼이고 저녁해가 끝까지 비춰 주어 좋은 곳」이라는 상륙 제1성을 터뜨렸다. 이 말을 해석해 보면 天孫(천손: 니니기)은 가야국 중에도 산골짜기 혹은 분지에서 살다가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인터뷰 - 가야大 李慶熙 총장



「日本皇室의 고향」이라는 碑가 세워져 있는 가야大

 

 

가야大 예술대 工房을 견학한 필자에게 도자기 제작 공정을 설명하고 있는 李慶熙 총장.
지난 2월15일 오후 2시의 약속시간에 맞춰 고령읍 지산리 산 120번지 가야대학교의 총장실로 찾아갔다. 휴대전화를 넣으니 李慶熙(이경희) 총장은 『지금 예술대학 工房에 있으니 이리로 오라』고 했다.

李총장은 1999년 가야大 뒷산에 「고령이 일본 황실의 고향」이라는 내용을 담은 石碑(석비)를 세워놓고 매년 4월 「高天原祭(고천원제)」를 주최하고 있다. 高天原祭에는 매년 내국인과 일본인, 수백 명이 참석해 오고 있다.

―李총장께서는 高靈이 「일본 황실의 고향」이라고 주장해 오셨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변한 12개국 가운데 오늘날의 고령 지방에는 미오야마터(彌烏耶馬臺)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오야마터는 BC 1세기경부터 철이 생산되어 그것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농업생산량이 증대되었어요. AD 1세기부터는 미오야마터를 加羅라고 불렀습니다. AD 170년경에는 가라에 살던 사람 일부가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을 지배하고, 정권을 세우고, 스스로를 야마터(大和)族이라고 불렀어요. 모음이 다섯 개밖에 없는 일본어로는 「야마터」로 발음할 수가 없으니까 후대에 이르러 「大和」라 써놓고 「야마토」라고 읽는 것이죠』

李총장은 오는 4월15~20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市에서 열리는 「李慶熙의 한국전통 陶磁展」에 출품할 그릇 제작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가마에 불을 때기 직전이어서 공방 안은 매우 추웠다. 그럼에도 팔순 연세의 그는 필자를 공방의 이곳저곳을 30분쯤 견학시켰다. 이어 총장실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했다. 난방시설이라고는 소형 석유난로 하나뿐이어서 춥기는 매일반이었다.

―李총장의 말씀은 언어학적 연구에 따른 것인데,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까.

『일본 후쿠오카(福岡)大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교수가 최근 「북부 규슈의 야요이(彌生) 문화와 半島系 유물」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발굴된 「한국식 小銅鐸(소동탁)」 및 「한국식 小銅鏡(소동경)」의 원산지가 모두 가야 지방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李慶熙 총장은 필자에게 오다 교수의 논문을 제시했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 1. 한국식 小銅鐸 ― 宇佐市 別府유적

1977년에 발견된 이 小동탁은 일본에서 발견된 한국식 小동탁 제1호이며, 이래 후속자료의 발견이 없는 귀중품이다. 경북 월성군 入室里 유적에서 발견된 제1호 小동탁과 형상·法量에서 모두 닮았다.

2. 한국식 小銅鏡 ― 竹田市 石井入口유적

1981년에 발견된 이 小동경은 경북 영천군 漁隱洞(어은동) 유적 발견의 B群 鏡과 同范鏡(동범경)을 구성하고 있다>

『가라에서는 중국의 銅鏡을 모방해서 倣製鏡(방제경)을 만들었는데, 그 몇 개가 규슈 오이타(大分)현 大竹市 石井入口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小동경은 영천군 어은동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A群 거울과 동일한 鑄型(주형)으로 만든 것이란 얘기입니다』



任那의 뜻은 「임의 나라」

 

 

李慶熙 총장이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설명하면서 天下名品 10가지 중 고려 翡色(비색)청자가 들어간다고 쓰인 自筆을 들어 보이고 있다.
―총장님을 만나기 전에 학교를 둘러보다 뒷산에서 「高天原碑」를 보았습니다. 碑 옆면에 새겨진 「건립 취지문」에는 『이곳이 가야제국의 宗家인 任那가야의 옛 땅이며, 일본문학박사 마부치가 일본 신화 속에 나오는 高天原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디다. 「임나가야」는 우리 학계에선 대체로 김해의 금관가야로 보는 데 반해 일본 학계에선 가야 諸國(제국) 전체로 보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부치 교수는 「임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임」은 주인님 혹은 어머님의 「任」자이고, 「나(那)」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古都 나라(奈良) 역시 한국어의 「나라」인 것입니다. 「임나」란 말은 狗耶(구야)나 加羅 또는 加耶를 고향으로 삼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우고, 이들이 고향땅을 부를 때 사용한 말이라고 하더군요』

―狗耶라면 김해의 금관가야, 加羅라면 고령의 대가야를 의미하는데, 일본 천황가의 선조를 굳이 고령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령에서 하룻밤을 걸으면 牛頭峰(우두봉)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高天原과 牛頭峰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진 地名(지명)일까? 여기서 일본의 건국신화의 한 토막을 간략하게 소개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일본 신화 속의 최고神 아마데라스의 남동생 스사노(素?鳴尊)는 소년 시절부터 살인·방화를 일삼았다. 누나(아마데라스)가 봄에 종자를 뿌린 농지에 씨앗을 한 번 더 뿌리는가 하면, 가을엔 누나의 밭에 망아지를 몰아 넣어 곡식을 뜯어먹게 하고, 누나의 새 집의 방에 들어가서 대소변을 보고,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고 있는 누나에게 피가 뚝뚝 흐르는 망아지 껍질을 던져 놀란 누나가 베틀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했다.

격분한 아마데라스는 스사노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면서 天石窟(천석굴: 아마노이와야)에 들어가 돌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이로써 세상이 캄캄해져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高天原의 神들(사실은 마을사람들)은 큰일났다 하며 강가에 모여 어찌하면 「태양의 神」 아마데라스가 석굴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가를 의논한 끝에 이벤트性 계책을 세웠다.

석굴 밖에서 시끌벅적한 굿판이 벌어지자 궁금해진 아마데라스가 돌문을 삐죽 열고 밖으로 내다보았다. 이 순간, 팔힘이 센 神 하나가 숨어 있다가 얼른 아마데라스의 손을 잡고 당겨 석굴로부터 끌어내었다. 「태양의 神」이 석굴에서 나옴으로써 세상은 밝아졌고, 高天原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高天原 사람들은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스사노의 추방이 결정되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스사노는 『풍우가 심해 曾尸茂梨(소시모리=쇠머리山=우두봉)에 가기 어려우니 오늘밤만은 이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도롱이(雨衣)를 만들어 입고 밤새도록 걸어 우두봉 밑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살았다.



일본인들이 한국땅에서 「牛頭峰」을 찾는 까닭

 

 

高天原 거주 神들의 계보도가 새겨진 石碑. 고령읍 가야大경내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경북 고령 땅이 옛 高天原이라는 가능성이 큰 것 아닙니까. 고령 근처인 경남 거창군 가조면 가야산국립공원 안에 가야산의 정상인 牛頭峰이 있거든요. 이 산 밑까지는 고령에서 약 35km 거리인 만큼 옛길을 걸어간다면 하룻밤 사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우두봉」이 몇 개 더 있습니다. 明治 이래 일본 학자들은 한국말의 「소머리」, 즉 牛頭里로 생각하고 한국 전역에서 牛頭里를 찾는 노력을 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朝鮮地名考(조선지명고)」를 쓴 아유가이(鮎貝房之進)에 의하면 明治시대에는 춘천의 우두산을 소시머리(우두리)로 생각하고, 이것에 의문이 생기자 제2차로 부산지방에서 우두산을 찾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도 약점이 발견되자 제3차로 한강 하류 설이 나오기도 했어요.

『1994년 일본 雄山閣에서 발행한 천문학자 와타나베 토시오(渡邊敏夫) 著 「일본·한국·중국의 日蝕(일식)·月蝕 寶典」에는 서기 146년 8월25일 한국 고령 지방 일대는 「金環日蝕(금환일식)」이었다는 연구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마데라스가 天石窟에 들어간 날이 서기 146년 8월25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최근, 在野(재야) 사학자 朴性興(박성흥)옹은 충남 당진군 당진읍 우두리 거북산에 있는 土城을 「소시머리」로 比定해 필자도 현장을 답사한 바 있다. 당진읍의 우두리에는 토성이 두 곳이 있다. 현지에서는 거북산에 있는 토성을 「우두산성」, 봉우리를 「구지봉」이라 하고, 가성산에 있는 토성을 「가성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朴性興옹은 『313년 고구려 美川王의 樂浪(낙랑) 공격으로 중국세력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예산군 大興 지방에 있던 임나국의 미마키宮에서 살면서 농경문화를 지닌 漢系 스진(崇神)왕이 위협을 느껴 김해 방면으로 망명해 일정기간 머물다 규슈로 건너가 일본 天皇家의 실질적 창업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李慶熙 총장과 朴性興옹은 일본 천황가의 선조를 가야계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스사노의 鄕愁

―앞에서 거론했던 스사노는 일본의 2大 건국신화 중 하나인 이즈모(出雲)계 신화의 주인공인 만큼 그의 그 후 행적에 대해 더 언급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두봉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스사노가 그의 아들과 함께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해 바다를 건너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에 건너간 시기는 그보다 7~8년 뒤인 서기 154년경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高天原에서 惡神이었던 스사노는 이즈모에서는 善神으로 변신했다. 그는 머리와 꼬리가 각각 8개나 되는 八岐大蛇(야마다노오로치)를 퇴치하여 민중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은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 달린 오로치」를 「여러 명의 괴수가 거느린 많은 오로치族」으로 해석한다. 또 『「오로치」는 당시 일본 동해안 지대에 침입하여 농작물을 강탈해 간 고구려族의 일족인 ?婁(읍루)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스사노도 가끔 「가라국의 나의 고향에는 금과 은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오고 싶다」고 했다. 스사노의 鄕愁(향수)인 셈이다.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은 스사노를 「加耶神」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설립한 대구공업대학 이웃에 있는 가야박물관에는 기원 1~2세기에 가야국에서 생산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10년 전, 시마네縣 이즈모市 사다(佐田)町의 스사노神社를 견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 「스사노館」에는 2세기경 가야국에서 만든 녹이 많이 슬고, 3등분으로 부러진 鐵劍(철검) 한 자루가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것이 가야박물관에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나는 더욱 놀랐습니다. 고령읍 中山里(중산리)에는 초기 가야시대의 土器窯址(토기요지)가 있어요. 格子紋(격자문) 토기는 그곳에서만 구운 것이기 때문에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스사노館」에도 높이 30cm 정도 되는 격자문 토기 항아리 한 개가 유리상자 안에 진열하고 있습디다. 그것과 똑같은 것이 우리 가야박물관에도 진열되어 있거든요』



『고령 땅에선 「三種의 神器」가 많다』

이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초대 천황 진무(神武)의 祖父(조부)로 기록한 니니기미코토(瓊瓊杵尊·以下 「니니기」로 표기함)의 정체에 대해 거론할 차례이다. 니니기는 「일본열도의 창조신」인 아마데라스(天照大神)의 아들과 다카미무스히(高皇産靈神)의 딸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니니기가 고령 출신이라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증거는 아마데라스가 高天原을 떠나는 孫子 니니기에게 소위 「3種의 神器(신기)」를 주었습니다. 그 「3종의 신기」는 고령읍 일대에 있는 고분을 발굴하면 흔히 나오는 유물입니다. 내가 설립한 가야박물관에는 「3종의 신기」와 생산연대가 같은 철검 세 자루, 비취 곡옥 10개, 銅鏡 50장이 진열되어 있어요. 마부치 가즈오 교수는 이것을 보고는 고령이 高天原의 옛 땅임을 확신하더군요』

―마부치 교수는 어떤 분입니까.

『마부치 박사는 일본 츠쿠바(筑波) 대학에서 정년퇴임하고, 쥬오(中央) 대학에서 8년간 일본 古文學을 강의한 원로 학자입니다. 그분에게 배워 한국의 대학교수가 된 사람만 20여 명이나 됩니다』

―마부치 교수와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 「高天原 고지」라는 碑를 세우게 되었습니까.

『1998년 9월, 우연히 내 손에 마부치 교수가 쓴 「高天原 故地」라는 소책자 한권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경북大 대학원 일본문학과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 마부치 교수와 오랜 知面이 있는 경북大 李琮煥(이종환) 교수가 일본 시마네(島根)縣立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어요.

이종환 교수에게 전화를 넣어 「마부치 교수의 高天原이 옛날 고령이라는 학설을 전폭 지지한다. 내가 마부치 교수와 공동으로 高天原 고지라는 石碑를 세우고 싶다. 마부치 교수의 동의를 얻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반응은 어떻든가요.

『이종환 교수가 「마부치 선생과 누차 교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더군요. 마부치 교수의 거절 이유는 「일본에는 칼잡이 국수주의자가 많다. 만약 高天原이 옛날 고령이라는 碑를 세웠다가는 칼잡이가 내 배를 찌를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1998년 10월, 내가 東京으로 건너가 마부치 교수를 만나 「만약 칼잡이가 선생님의 배를 찌르려고 한다면 그 碑는 李慶熙가 세웠으니 李慶熙의 배를 찌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마부치 선생이 「나도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배를 찔려도 좋다」고 쾌히 승락하십디다』

―韓·日의 두 원로 학자가 목숨을 걸고 놓고 비장하게 세운 것이 「高天原 故地」 碑군요.

『나는 경남 산청군 始川面 德山里 강가에서 큼직한 자연석을 구해 와 가야大 고령캠퍼스 안 高天原공원에 세웠는데, 글씨는 東京 成德여자대학 히구치(?口信夫) 교수가 써 주었습니다. 1999년 6월28일 나는 마부치 교수를 비롯해 일본 인사 50여 명과 국내 인사 500명을 초청해 「高天原 故地」 碑 제막식을 열었습니다. 제막식 후에는 우리 대학 대강당에서 마부치 교수가 「高天原의 위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학술강연도 했습니다』

李총장과의 인터뷰는 4시간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는 26번 국도 등을 승용차로 달려 고령군 쌍림면, 합천군 야로면·가야면을 거쳐 海印寺(해인사)의 山門 앞까지 답사했다. 중도에 悲運(비운)의 왕자 月光太子(월광태자)의 전설이 얽힌 月光寺(월광사)에 들를 생각도 했지만, 이미 밤이 깊었다.

月光太子라면 대가야의 異腦王(이뇌왕)이 신라 왕실에 청혼해 맞이한 신라 왕녀(이찬 比助夫의 여동생)과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다. 이때 신라 왕녀는 100명 시녀를 데려왔는데, 시녀들의 간첩활동으로 대가야-신라의 결혼동맹은 파탄나고 말았다.

달빛 아래 月光寺 앞에 얼쩡거린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밤길을 도와 다시 고령군 쌍림면의 숙소로 돌아왔다.


▣ 역사의 진실



5000년 전부터 韓·日 간에 「바다의 길」 열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한반도에 붙어 있던 일본땅이 섬이 된 것은 약 1만 년 전이었다. 약 1만 년 전, 지질학에서 말하는 제4間氷期(간빙기)에 들어오면 기온이 높아져 해수면도 상승해 대한해협과 소야(宗谷)해협과 쓰루가(津輕) 해협이 생겼다.

일본이 섬이 되어 버리면 한반도와 다른 문화가 형성된다. 일본열도는 대륙문화로부터 고립해 있었다고 보여졌다.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이미 명확하게 깨어졌다. 1969년,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으로부터 규슈 지방에서 만들어진 조몬(繩文)토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수년 후엔 對馬島의 코시다카(越高) 유적에서 한국의 櫛目土器(즐목토기)가 출토되었다. 코시다카 유적은 5000년 전 조몬文化 초기에 속하는 유적이기 때문에 그 무렵에 이미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엔 「바다의 길」이 열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후쿠오카(福岡)공항 남서 약 1km. 미카사(御笠)川을 따라 폭 100m 정도의 언덕이 남으로 달리고 있다. 이 언덕의 북측 주변이 일본 최초의 논(田) 유적으로 유명한 이타즈케(板付) 유적이다.

벼농사는 「문화의 영향」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연간을 통해 계획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벼농사의 기술은 간단히 몸에 배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의 시작은 그것이 몸에 밴 인간의 이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韓半島人이 일본에 벼농사를 퍼뜨려

벼농사 농민의 일본 移住 루트에 대해 敗戰(패전) 전의 일본학계에선 중국 강남 → 대만 → 오키나와 → 北규슈의 北上說이 유력했다. 그러나 북상설은 패전 후 부정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 江南 → 한반도 → 북규슈 → 가고시마 → 오키나와로 南下했음이 판명된 것이다.

일본의 벼농사는 기원전 4세기에 한반도로부터의 이주집단이 갖고 간 것이었다. 아무튼 벼농사는 약 100년 만에 아이치(愛知)현까지 퍼지고, 200년 후에는 도후쿠(東北) 지방까지 북상했다.

일본에서 처음 벼농사가 정착했던 후쿠오카의 이다즈케(板付) 남방 약 3km에 스쿠(須玖) 구릉이 있다. 이 구릉에서 수백 개의 옹관과 동검 6개, 銅?(동모) 45개, 銅戈(동과) 77개 등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 무기류는 모두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이었다. 옹관에 死者(사자)를 장사하고, 거기에 청동무기를 넣는 문화는 김해 등지에서도 다수 발견되어 기원 1세기경 한반도 남부와 北규슈 지방이 동일문화권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明治헌법 아래의 일본에서는 「우수한 단일민족(大和民族)論」을 이데올로기化했다. 東京大 교수 세이노(淸野謙次)는 조몬 貝塚에서 발굴된 인체를 계측해 조몬人이야말로 현대 일본인의 직접 선조라고 역설했다. 단일민족론은 패전 후에도 계승되었다. 심지어 진보적 역사가로 알려진 이노우에 야스시(井上淸: 京都大 교수)도 그러했다.

1953년, 시모노세키(下關)市 북쪽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인골이 발견돼 이후 5년간 300여 체를 발굴했다. 이것을 계측한 규슈 대학 가네세키(金關丈夫) 교수는 조몬시대의 인골 및 古墳시대의 인골과 비교해 초기 야요이(彌生)人은 신장으로 보아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조몬人의 평균 신장은 남자 160.2cm, 여자 148.0cm인 것에 비해 초기 야요이人은 남자 163.2m, 여자 151.0cm로서 야요이人이 조몬인(지금의 아이누族)보다 평균 3cm 크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몬人의 얼굴은 폭이 넓고 上下가 짧다. 또한 미간이 높고 융기돼 鼻根部(비근부)가 우뚝하고, 鼻骨(비골)이 높다. 이에 비해 야요이人은 얼굴이 길고, 미간과 鼻根部가 편평하다. 결국 장신에다 미끈한 얼굴 생김이다.

인류학자 오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현대 일본인의 頭骨의 지역차를 분석해 얼굴이 길고 키 큰 집단이 도래해 세토(瀨戶) 內海로부터 기나이(畿內) 지방에 들어와 다시 간토(關東) 지방에까지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서기 700년의 일본 인구, 한반도로부터의 이주자가 80%

일본의 국립 민족학박물관大 오야마(小山修三)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사용해 인구동태를 추계한 바 있다. 그것에 의하면 조몬 後期 일본열도의 인구는 16만 명 정도였지만, 조몬 晩期에는 한랭화와 식량 부족 때문에 기원전 300년의 인구는 7만5000여 명으로 격감했는데, 서기 700년의 인구는 540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서기 700년 인구 540만 명은 기원전 300년 이후 1000년간 年평균 인구증가율 0.4%이 넘어야 가능한 수치이다. 이때까지의 연구로서 보고된 세계 각지의 초기 농경단계 인구증가율은 0.1~0.2%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인구 격증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87년, 東京大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 교수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으로부터 1000년간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渡來(도래)가 없었다면 인구 540만 명에 달할 수 없다는 설을 발표했다. 즉, 인구학·인류학적인 시각에서 서기 700년 현재, 「도래인」과 일본 원주민의 수를 추정해 도래인과 일본 원주민의 비율을 「80% 對 20%」 혹은 「90% 對 10%」라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도래인들은 쌀농사 및 금속기(청동기·철기)의 기술과 샤머니즘 등의 새로운 문화를 가져가 퍼뜨렸다. 일본문화의 여명은 이로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니하라 교수는 도래인들의 국적은 밝히지 않고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인」이라고만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보이는 도래인을 분석해 보면 도래인의 거의 전부가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현대 일본인의 절대다수는 渡來의 시기를 달리하긴 했지만, 在日同胞(재일동포)인 셈이다. 따라서 일본 고대국가史의 진실은 한국인에 의한 일본 개척史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古代 천황과 지배층의 原籍(원적) 역시 加耶일 수밖에 없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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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사진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출처 :날아라! 정대세 원문보기글쓴이 : 뽀로로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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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1)

본 기사는 2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글 | 이태훈 월간조선 사진기자

 

 

 

 

전성기 大加耶의 떼무덤

 

 



 

 

경북 고령군 지산동 주산 능선에는 대가야 왕과 왕족들의 무덤 200여개가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최근 관광객들이 고분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고 있다./조선DB

大加耶(대가야)는 後期(5세기 초엽~6세기 중엽)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다.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을 잘 보여 주는 곳이 경북 高靈郡(고령군) 고령읍 池山洞(지산동) 고분군이다. 지산동 고분군에는 主山(주산·310.3m) 남쪽으로 뻗은 主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우람하게 조성된 대형 봉토분 5基를 비롯해 大小 200여 基가 분포하고 있다.

오전 9시, 지산동 소재 대가야박물관 앞 주차장에서 李泰勳 사진기자와 만나 박물관 옆으로 난 좁은 길을 통해 主山에 올랐다. 금세 편평한 구릉에 닿는다. 구릉의 한켠에 웅대한 「대가야왕릉전시관」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殉葬(순장)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1:1의 크기) 재현한 것이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무덤의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副葬品)의 종류와 성격 등을 살필 수 있다.

 

대가야의 금동관. 지산동 32호에서 출토된 이 금동관은 표면에만 도금이 되어 있다. 형태상으로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새 날개 모양(鳥翼形) 장식과는 달리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 장식을 세운 점에서 가야를 대표하는 관으로 평가된다. 높이 19.6cm. 중앙박물관 소장.
순장이란 한 사람의 무덤 주인공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이다. 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의 삶이 그대로 지속된다는 繼世(계세)사상을 따라 행해졌다.

순장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신분 계층이 뚜렷하고, 가부장적인 고대사회에서 성행했다. 先史(선사)시대의 인간은 死後世界(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현재의 삶이 끝나면 곧 來世(내세)로 들어간다는 신앙이었다.

따라서 사후세계에서도 현재와 똑같은 물질생활을 계속한다고 생각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고 묻히는 형태로 순장이 나타난 것이다. 순장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계세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순장을 큰 저항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망치 같은 것으로 가격되어 뒤통수가 함몰된 시체도 더러 발견되었다. 그런 모습들은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순장을 기피하려다 당한 흔적인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의 殉葬 무덤 지산동 제44호

44호분은 묘역 중앙에 으뜸돌방(主石室)과 딸린돌방(副葬石室) 2개의 대형 돌방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형의 돌덧널(石槨) 32기를 빙 둘러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호석)로 둘러싼 多槨墳(다곽분)이다. 규모는 호석을 기준으로 최대 지름 27m, 높이 3.6m의 대형 봉토분이다.

순장자의 모습 등을 확인하기 위해 능묘 중앙부까지 돌출시킨 좁은 통로를 따라 으뜸돌방에 다가갔다. 으뜸돌방 중앙에 누운 주인공의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1명씩 순장되어 있고, 딸린돌방 2개와 순장 돌덧널 32개에도 각각 1명씩 순장자가 묻혀 있다. 순장자 수가 무려 36명에 이른다.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되기는 했지만, 긴 목 항아리(長頸壺),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蓋杯), 그릇받침(器臺) 등 토기류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남쪽 딸린돌방에서는 대형 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다.

이 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 武具類(무구류), 말띠드리개, 금제 귀고리, 管玉(관옥)·유리옥·曲玉(곡옥) 등의 옥류, 청동그릇 등도 출토되었다. 백제 혹은 中國系로 보이는 등잔 1점과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夜光(야광) 조개국자 1점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왕의 무덤으로 보인다.

 

池山洞 44호분 발굴작업 모습.
대가야왕릉전시관 뒤로 난 오솔길을 통해 다시 主山으로 올랐다. 금동관이 출토된 32호분에 이어 33~39호분까지 자리잡고 있다. 지산동 44호분은 비교적 넓고 편평하나 主山이 경사져 내리는 끝부분에 걸쳐 있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44호분 바로 위쪽에 45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45호분은 남북으로 경사진 묘역의 중앙에 으뜸돌방과 딸린돌방 2개를 나란히 설치하고, 그 주변에 11개의 순장석곽을 원주상으로 배치한 다곽분이다. 11기의 순장곽 외에 主石室에 2인 이상, 副石室에 1인 이상의 순장자가 있었다. 봉토의 규모는 최대 지름 28.2m, 높이 2.8m이다.

부장품은 으뜸돌방에서 뚜껑 있는 짧은 목 항아리 등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제 冠飾(관식)·금제 귀고리·曲玉이 달린 유리구슬 목걸이 등 장신구류와 말안장·재갈·금동은장형 마구류, 은장 환두대도, 鐵矛(철모), 철촉 등과 함께 찰갑편 등이 출토되었다.

45호분 위쪽에는 46~49호분, 50호·51호분 등이 열병을 하듯 줄지어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5~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이곳에는 고령읍을 끼고 흐르는 대가천과 안림천이 만나 한 줄기가 되는 會川(회천)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望山(망산)이 오똑 솟아 있다.

폭 2m짜리 고분로는 아기자기한 10리 산길이다. 꿀밤나무와 소나무로 어우러진 「主山 삼림욕장」 들머리길 아래로 主山城(주산성)의 흔적이 숨어 있다. 주산성은 대가야의 宮城(궁성) 방어를 위한 산성이었다. 수직으로 쌓은 높이 2m의 석축-이제는 허물어져 지표 위엔 이 부분만 남아 있다.

삼림욕장을 지나 下山하면 나지막한 구릉 위에 高靈鄕校(고령향교: 고령읍 연조리 608)가 위치해 있다. 향교 자리는 대가야 시대의 왕궁지였다고 전해 온다. 대가야 멸망 후, 신라·고려 시대엔 불교사원, 조선시대엔 유교 교육기관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읍내 한복판으로 내려왔다. 이곳에는 보물 제54호 지산동 幢竿支柱(당간지주)가 보인다.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에 세워 在家(재가)신도들에게 불교 관련 행사를 알리는 깃발을 다는 게양대이다. 신라가 대가야의 왕궁터에 절을 세운 이유는 망국의 恨(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라 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殉葬墓(순장묘)인 지산동 44호분의 主석실 내부 모습이 대가야박물관 경내에 재현되었다. 主석실의 중앙에 주인공이 누워 있고, 주인공의 머리맡과 발치에 각 1명씩 순장되어 있다.


대가야 토기의 특징-풍만함 속의 곡선미

 

고령군 개진면 낙동강변의 開浦나루. 대가야시대에는 對外교역의 창구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엽에 팔만대장경이 이 포구를 통해 海印寺로 옮겨진 후에는 開經浦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야산과 낙동강 중류 사이에 위치한 고령군은 先史시대 유적 등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 오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고령읍 지산리 460에 위치한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필자는 지산동 고분군 답사 하루 전날, 2005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에 들러 학예연구사 鄭東樂 (정동락)·손정미씨에게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대가야박물관을 견학했다.

대가야박물관에는 대가야 특유의 챙이 달린 철제 투구 등 무기류도 눈길을 끌었지만, 대가야 토기들이 「艶麗(염려)한 미인」처럼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가야 토기의 특징은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감이다. 특히, 뚜껑 있는 긴 목 항아리(有蓋長頸壺)는 강렬한 글래머이다. 긴 목은 가운데를 조르는 듯해 그릇의 허리 부분이 잘록하다. 그 안에는 잔잔한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다. 뚜껑 위에는 긴장한 乳頭(유두)를 닮은 꼭지가 달려 있다.

원통형 그릇받침(圓筒形器臺)은 늘씬하다. 암팡지게 부푼 모습의 굽다리 부분 위에 上下가 늘씬한 원통형 몸체를 세우고, 그 위를 볼록 솟아오르게 만든 다음 에 맨 꼭대기의 그릇받침부는 납작하고 넓게 벌어지게 했다. 몸통과 굽다리 부분에는 삼각형 혹은 사각형 透窓(투창)을 뚫었고, 투창 사이에는 좁은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다.

「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뚜껑 있는 항아리는 대가야 왕의 位相(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며, 「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는 대가야의 행정체계가 정비돼 있었음을 나타내는 물증으로 보인다.

 

男根을 닮은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立石. 立石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의 자연촌락이 분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토기는 5세기 초반부터 고령 지역 바깥으로 확산돼, 5세기 중엽에는 합천·거창·함양·산청을 거쳐 남원·하동 지역까지 뻗어 나갔다. 이런 대가야 토기의 분포 범위는 대가야의 정치적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대가야 장신구의 화려하고 실용적인 면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금관과 금동관 및 금귀고리이다. 가야 금관의 특징적인 모습은 꽃과 풀잎 모양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오늘에 전해 준다. 그렇다면 대가야人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금동관 등을 보면 대가야人들은 신라와 다른 의관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대가야人은 오곡을 주식으로 하고, 닭 등 가축을 길렀으며, 그물추를 이용해 누치 등 민물고기들을 잡았다. 그리고 남해안 지역으로부터 대구·청어 등 해산물을 수입해 먹었다. 무덤에서는 대가야人들이 먹고 버린 바다 생선의 뼈 등을 담은 토기도 발견되었다.

일반민은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이은 竪穴(수혈: 半地下)가옥에서 살았지만, 지배층은 高床(고상)가옥에서 살았다. 무덤에서 발굴된 집 모양 토기를 통해 대가야 당시의 가옥 형태를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고령 지역.

 

대가야의 宮城을 방어하는 主山城의 석축.

 

지산동 32SE-3호 내에서 음식물이 담긴 토기가 발견되었다.


舊石器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땅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낙동강변에서 발견된 舊石器시대의 유물 多面石器. 길이 9.0cm.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舊石器(구석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0만~6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령 지역에서는 다산면 곽촌리·상곡동 일대 낙동강변에서 약 4만~1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면석기(多面石器), 망치돌, 떼낸석기 등 10여 점의 구석기가 채집되었다.

그리고 고령읍 저전리, 개진면 良田里·신안리·반운리, 운수면 봉평리·운산리, 성산면 박곡리·어곡리, 쌍림면 산주리·매촌리, 우곡면 사촌리 등에 분포하는 고인돌(支石墓)이나 운수면 신간리에 남아 있는 선돌(立石) 등을 통해 청동기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령은 「岩刻畵(암각화)의 고장」이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면에 그림이나 도형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으로, 당시의 생활상과 신앙 등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고령에는 양전리(고령읍)·안화리(쌍림면) 등지에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가 분포되어 있다. 양전리 암각화는 고령읍 회천변 알터마을 입구의 나지막한 바위면에 새겨진 것으로 동심원과 여러 개의 가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과 기하학적 무늬의 의미는 뒤에서 상론할 것이다. 암각화가 위치한 곳은 솟대(蘇塗)와 같은 三韓시대의 聖域(성역)으로 首長의 주재 아래 농경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祭儀(제의)와 관련이 있는 장소로 생각된다.



대가야의 前身-半路國시대

 

양전동 암각화
기원 1세기에서 3세기 무렵까지의 한반도 남부는 삼한시대였다. 삼한시대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이라는 소국연맹체들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고령 지방은 변한에 속했으며, 그 이름은 半路國(반로국)이었다. 그러면 반로국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것일까.

인간의 역사에서 최대의 혁명적 진보는 농경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영위되었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문화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잉여 생산물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발생하는 등의 일대 변화를 불러왔다.

이후,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로부터 철기가 전해지면서 한반도 내에서도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삼한시대였다.

반로국은 경상남·북도 일대에 흩어져 존재하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인 國邑(국읍)과 이에 소속된 몇 개의 邑落(읍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읍에는 소국의 최고 지도자인 主帥(주수), 읍락에는 차상급 지도자인 渠帥(거수)가 백성들을 다스렸다. 반로국 당시 고령 지역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물들은 개진면 반운리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가야가 자리 잡은 고령 지역은 최상의 농업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星州郡(성주군)에서 흘러오는 대가천은 가야산에서 흘러오는 안림천과 고령읍에서 합류하여 회천이 되고, 회천은 계속 남류하다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가천과 안림천은 고령읍과 그 부근에 비교적 넓은 골짜기와 충적지를 형성해 놓았다. 李重煥(이중환)은 그가 쓴 「擇里志(택리지)」에서 「고령은 衣食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대가야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 양전리 암각화 모형
『골 바깥 가야천 주변은 논이 아주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120~130말이나 되며, 적더라도 80말에 이른다. 물이 넉넉해 가뭄을 모르고 밭에는 목화가 잘 되어 이곳을 衣食의 고향이라 일컫는다』

가야천과 안림천이 합쳐서 이뤄진 회천은 낙동강 합류지점까지 약 15km에 걸쳐 좁은 골짜기 사이로 흐른다. 따라서 고령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낙동강과도 좁은 골짜기를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고령 지역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 4세기 무렵에 이루어졌던 冶爐(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 지역의 병합이었다. 冶爐라는 지명 자체가 「대장장이」와 「가마」를 뜻하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유명한 철의 산지이다.

「世宗實錄(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야로에서 많은 철이 생산되어 1년에 精鐵(정철) 9500근을 나라에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로면 야로2리 및 가야면 성기리 야동마을 뒤편에는 아직도 야철 유적이 남아 있다. 야로면과 인접한 고령군 쌍림면 용리 일대에도 야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반로국은 야로 지역 등의 철산을 확보해 철제 무기를 만들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청동기 농기구와는 한 차원 높은 철제 농기구를 만들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장을 발판으로 반로국은 4세기에 들어서면서 加耶諸國의 맹주국인 대가야로 발전했다.

 

고령읍 연조리 대가야 왕궁 터에 세워진 고령 향교.


自尊의 대가야 建國신화

보물 제54호. 지산동 幢竿支柱(당간지주). 대가야 멸망 후인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가야사회에는 두 계통의 건국신화가 병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三國遺事(삼국유사)」 가락국記에 실려 있는 首露王(수로왕)의 天降(천강)신화이다. 다른 하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대가야의 惱窒朱日(뇌질주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건국신화이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신라 말의 大유학자 崔致遠(최치원)이 지은 利貞(이정)이란 승려의 전기인 「釋利貞傳(석이정전)」에 기록된 것을 위의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야산의 산신 正見母主(정견모주)가 天神인 夷毗訶(이비가)와 感應(감응)하여 대가야 왕이 되는 惱窒朱日과 금관국왕이 되는 惱窒靑裔(뇌질청예)를 낳았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伊珍阿?王(이진아시왕)이 되었으며,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이와 같은 대가야 건국신화의 체계는 양전리 암각화에 기반을 둔 天神族(천신족)과 가야산을 근거지로 하는 地神族(지신족)의 결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가야 王系가 절대적 신성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을 이진아시왕의 동생으로 만들어 血緣化(혈연화)함으로써 대가야의 우위를 과시했으며, 언젠가는 가야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가 난생신화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天神과 山神의 결합에 의해 시조왕이 탄생하고 있다. 특히, 대가야 건국신화에선 가야산신인 正見母主가 주체가 되어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와 관련해 대구한의대 김세기 교수는 「대가야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대가야가 流移民(유이민) 세력에 의해 성립된 국가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신화는 邑落(읍락)국가 반로국이 처음 건국되는 양전리·반운리 지역의 암각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회천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암각화는 同心圓(동심원)과 얼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로 구성되어 있음은 앞에서 썼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시 김세기 교수의 저서 「대가야연구」의 인용이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여 天神을 의미하고, 얼굴 모양은 人面·假面 혹은 神面으로 보아 地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런데 암각화 내용에 동심원은 4개인 데 비해 얼굴 모양은 17개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암각화는 천신과 지신의 결합에 의한 탄생의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지신이 천신보다 더 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왕이 천신의 아들이 아니라 正見母主의 아들로 표현된 것이다』

 

2005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

 

 

 

(2편에서 계속)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41116037&nidx=16038&chosun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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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dayhumor.com/?humorbest_975350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RJFP5

 

 

출처 : 안방TV가 빛나는 밤에
전통은 전통 그대로 보존하고
동시에 시대의 흐름에 맞춰 현대식으로도 만들어내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별 느낌이 없지만
외국에서는 생소한 한국의 독특한 문화

"바닥난방 문화(온돌 문화)"
전통 가옥을 넘어
일반 가정집부터 가게 호텔 등 건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음
- 바닥난방 보일러-
=====================
(처음 올린 글에서 새로 추가)
바닥난방 보일러 자체는 한국이 최초로 만든게 아닙니다!!
하지만 전통 온돌 난방 기술을 접목한 한국형 보일러가 나오고 있죠
비록 '바닥난방 보일러' 자체는 한국에서 처음 나온게 아니지만,
온돌문화에 익숙한 한국에서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됐고
전통 난방 방식을 접목시켜 독자적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것 같습니다
======================

 

 

 


-바닥 찜질-




-전기매트 / 돌침대-

 

 

세계적으로 바닥난방 문화가 있는 곳은
'한국 & 중국'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은
1. 한국은 바닥 전체 난방 / 중국은 바닥 부분 난방 (침실만)
2. 한국에서 바닥난방은 신분을 막론하고 대중적 / 중국은 일부 소수 지역에서만
중국에도 어느 지역에 바닥난방 문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 뿐
한국에서는 민중은 물론이고 사대부까지 두루두루 온돌문화를 이어옴
현재 중국이 바닥난방 기술 자체를 중국 고유 기술이라 주장하고 있고
이에 맞서서 한국은 '바닥난방 기술(온돌)'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것을 추진 중

 


 

 


현재
전통 바닥난방 문화는 전통 그대로 보존하고
현대화한 것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수출 중
한국에 볼 거 없다
딱히 한국적인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말 많이 들어봤습니다
경복궁 같은 곳만 한국적인 장소인게 아니에요
건물 외관이 한국적이 아니라도
건물 내부에 한국적인 소품이 없어도
아무 상관 없어요
바닥난방 문화를 고수한 이상, 당장 우리들 집도 한국적인 곳입니다!

 


 




한량011 (2014-11-14 22:06:12) (가입:2014-10-14 방문:28)
온돌이 참 재밌는 것은 주로 북부 지역에서 시작해서 그 발전하는 양상을 비교적 확실하게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ㅎ
초창기의 온돌은 지금의 중국과 같은 쪽구들의 형태이다가 점점 갈수록 바닥 전체를 달구는 형태로 변화하는데 그것이 시대별 유적지에서 잘 들어나서 문화의 계승성을 알아보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일전에 읽은 서적에서 그러더라고요 ㅎㅎ

쥬엔류 (2014-11-14 22:14:14) (가입:2014-10-12 방문:33)추천:4 / 반대:0
근데 온돌 문화도 조선 시대에 반쯤 사장되었다 다시 살렸다란 말이 있던걸 봐선..

Lemonade (2014-11-14 22:34:57) (가입:2012-06-21 방문:430)추천:12 / 반대:0
본문에 첨언을 하나 해보자면 바닥 난방은 비단 중국이나 우리만의 무언가는 아닙니다, 로마를 시작으로 중세 유럽을 거쳐 서양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비단 거기 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까지 바닥 난방 방식을 선호했던 이들은 여럿 있지요.

Lemonade (2014-11-14 22:36:50) (가입:2012-06-21 방문:430)추천:17 / 반대:0

 


가령 로마의 바닥 난방 방식인 히포코스타hypocaust는 상기의 그림과 같은 방식입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네 온돌과 매우 흡사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Lemonade (2014-11-14 22:37:25) (가입:2012-06-21 방문:430)

 


요건 히포코스타의 남아있는 유적 사진이지요.

Lemonade (2014-11-14 22:41:03) (가입:2012-06-21 방문:430)

 


이러한 로마 문명은 후에 중세 유럽의 난방 방식인 글로리아로 이어지게 됩니다,


먼지다듬이싫 (2014-11-14 22:49:25) (가입:2014-09-03 방문:62) 추천:7 / 반대:0
Lemonade//
로마에 온돌과 비슷한 난방 시스템이 있다는건 봤지만, 이렇게 자료로 본 건 처음입니다!
저는 유럽 쪽에서는 중세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바닥 난방 시스템이 사라지고, 현재까지 이어지지 못한 줄 알았습니다
글로리아는 Lemonade님 덕분에 알게됐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sungsik (2014-11-14 22:49:47) (가입:2009-10-13 방문:2552) 추천:13 / 반대:1
뭐... 로마에서 쓰여졌다고 하나 그 보편성에서 차이가 크겠지요.

조선에서 온돌에 대해 걱정한 것은 온돌을 떼기 위한 땔감을 마려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실에서도 온돌방을 줄이는 것을 하나의 아름다운 덕목으로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사람인 이상 따뜻한 방을 싫어할리가 있겠습니까.
조선 중기가 되면 온돌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덕에 상당히 많은 산이 황폐화가 됩니다.

1900년쯤 조선에 온 외교관이 굉장히 허름한 집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바닥이 너무 뜨거워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는 걸 보면
양천을 구분할 거 없이 정말 거의 모든 집이 온돌을 썼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선은 온돌의 나라였을 겁니다.

게다가 조선 궁궐만 봐도 굴뚝이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죠.
얼마전에 창덕궁에 갔는데 여친에게 저게 뭐인 거 같냐..하니까 잘 모르길래 굴뚝이다 하니까 놀래더군요.

sungsik (2014-11-14 22:50:12) (가입:2009-10-13 방문:2552)

 


창덕궁 굴뚝 사진..

sungsik (2014-11-14 22:50:21) (가입:2009-10-13 방문:2552)

 


 

Lemonade (2014-11-14 22:57:10) (가입:2012-06-21 방문:430) 추천:2 / 반대:0
끝으로 하나만 더해보자면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게 바닥 난방 그 자체는 특별할게 없으나 온돌이 우리의 또한 캉이 중국의 전통적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에 기인합니다,

앞서 올린 히포코스타는 욕탕의 온수가열과 난방에 국한되며 글로리아 역시 집의 어떠한 한 구역 그러니까 대규모 시설에서의 국한적 활용에 기인하는 반면 우리의 온돌이나 중국의 그 것은 소규모 가옥 전체의 난방을 목적으로 합니다,

기술적으로도 차이가 있지만 뭐 그러한 것은 패스하고 아무튼 서로간의 필요성, 문화, 시각 심지어는 종교에 이르르기까지 차이가 있기에 명맥이 끊기지 않고 내려왔냐 아니냐, 같은 바닥 난방인데 용도가 다르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예컨데 바닥 난방 그 자체는 우리 고유의 무언가는 아닙니다, 다만 그 바닥 난방 방식중 온돌은 우리의 전통적 문화라 말할수 있습니다. 반대로 캉의 경우 중국의 전통적 문화라 말할수 있지요.

경대위문대 (2014-11-14 23:00:19) (가입:2014-09-07 방문:64) 추천:0 / 반대:0
sungsik님의 외교관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 같네요.

sungsik (2014-11-14 23:32:17) (가입:2009-10-13 방문:2552) 추천:1 / 반대:0
경대위문대// 다시 보니 외교관이 아닌 세로세프스키라는 폴란드인 출신 러시아 학자네요.
어떤 초가집에 머물렀는데 방이 너무 뜨거워 도저히 잘 수가 없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봐야 온 방이 뜨겁지 않은 곳이 없어서 날이 서늘해진 새벽에야 잠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가 10월 중순이었는데도 이렇게 뜨겁게 해놓고 잔 거 보면...
한국인은 진짜 방바닥 뜨겁게 자는 걸 좋아하긴 좋아하나보네요.

미카엘☆ (2014-11-14 23:33:20) (가입:2011-07-21 방문:1005) 추천:1 / 반대:0
우리는 당연히 아파트에도 바닥에 온돌의 개념으로써 복사 난방을 하지만,
외국에는 당연한게 아니고 친환경 건축으로써 복사 난방이란 이름으로 재조명 받은거에요
고로 온돌에서 변화된 형태가 아닌 제3국에서 재발견 했으며 한국에서 전파된 것이 아니란게 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일본에와서 조선건물을 보고 온돌에 착안을 해서 지어진 건축도 존재하긴 합니다.
Herbert Jacobs house라고 낙수장의 영향을 받은 건물이지요

미카엘☆ (2014-11-14 23:39:09) (가입:2011-07-21 방문:1005) 추천:1 / 반대:0
로마에도 있었지만 서양에서 바닥난방이 재조명 받은 것은 그것이 HVAC 시스템에 대비해서 복사 난방이 친환경적이라는 인식에 의해 퍼지기 시작한거라고 합니다.
중세 이후 유럽의 난방이라면 벽난로로 대표되는 대류난방이죠 혹은 침대에 넣었던 난로(놋쇠용기)라든지요
난방비 무서워서 온돌 놔두고 전기장판 돌리는 현실...
중요한건 마케팅이죠. 세상에 물고기 날로 먹는 나라가 어디 일본하나였겠습니까마는 그걸 발전시키고 대중적으로 어필한건 일본이니 스시가 Sashimi가 된거잖아요? 저작권이 프랑스인이 올렸든 일본에서 보고갔든 중요한건 인식을 Korean ondol로 박아놓는거죠
이런 전통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는게 후손의 의무가 아닌가 어머니께 어필하고 오겠습니다. 집이 너무 추워요....ㅠㅠㅠ
세계 최고의 난방시스템

한국어한국어 (2014-11-15 01:00:55) (가입:2013-08-27 방문:238) 추천:4 / 반대:0
현대화가 매우 성공적인 `한국 전통문화` 중 하나 -> 매우 성공적으로 현대화한 한국 전통 문화 중 하나, 현대화에 성공한 한국 전통문화 중 하나
저 서양인 심정이 이해가 가는게 시골 가면 할머니가 방바닥을 데우능게 아니라 걍 지짐 ㄷㄷ

먼지다듬이싫 (2014-11-15 01:06:49) (가입:2014-09-03 방문:62) 추천:2 / 반대:0
한국어한국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은 드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몰랐습니다ㅋㅋㅋ
수정을 할 수 없다는게 참 아쉽네요ㅠㅠ
독일식 난방이 좋던데

재패니즈드림 (2014-11-15 01:26:50) (가입:2014-06-11 방문:67)
바닥난방이란 문화자체는 세계적으로 종종 있던 보편적인 문화지만 현재의 보일러에 사용되는
배수관을 바닥에 깔아 온수를 바닥에 돌게하여 따듯하게 만드는 방식은 조선의 온돌을 모티브로 한게 맞습니다
그것을 고안한건 바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입니다
참고로 프랭크 로이드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한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건축가기도 하구요

하여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프랭크는 1914년 제국호텔의 설계를 의뢰받아 도쿄에갔다가 일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묵게된 건물이 바로 "자선당" 이였습니다 "자선당"이란 본래는 경복궁내에 있던 건물인데 일본인이 그것을 뜯어가
일본에 가져다 놓은 건물입니다 (언젠가 다시 찾아와야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자선당"엔 당시 한국의 온돌이 깔려 있었고 추운 겨울 방안에 들어선 프랭크는 별다른 난방시설이 없어보이는 방에서
온기가 올라오는것을 신기하게 여겼고 이것이 한국의 온돌이라는 난방방식이라는것을 알게되었고 자신의 자서전에도
온돌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적어두었습니다 또한 이 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을정도였죠

이것이 모티브가 되어 프랭크는 도쿄 제국호텔에 세계최초로 전기방식으로 된 온돌을 도입하였습니다
그후 미국에서도 프랭크는 30여채의 건물에 이 개량온돌을 적용했고 이 방식을 좀더 개량한것이 바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뜨거운 온수파이프를 바닥에 깔아 난방을 하는 방식으로서 우리가 집집마다 설치한 보일러가 바로 이 방식입니다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한국고유의 전통문화이자 독창적인 난방방식인 온돌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간후
미국인의 손에 의해서 개량되었고 이 방식이 현재 유럽 , 북미 , 아시아 , 호주등 전세계에 널리 전파된 보편적인
난방방식이 되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세계속의 한국을 찾으라 하면 가장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온돌을 꼽고 싶습니다
어떤것보다 한국적이고 세계적이며 좀 과장하자면 한류의 최초이자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게 바로 한류죠
그냥 세계속에서 우리것이 쓰이는 구나 하고 만족하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거 같아요.
이름을 붙여야 되요. 홍보도 해야하죠. 윗분 말씀처럼 일본 스시 같이요.
가치창출을 하게끔 해야하겟죠.
일본생활중인데, 보일러바닥이 너무 그리워요....한국에서 거실화를 안쓰는건 다 보일러덕분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
애니나 드라마에서 다 실내화를 신는건 드라마여서가 아니예요...발시려워요ㅠㅠㅠ

 


 

 

 

http://blog.daum.net/caninedogma/11101220

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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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그린 90년 전 한국과 한국인

엘리자베스 키스

1887-1956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도서관에 들렀다 우연히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란 책을 발견하고 놀라 마지않았던 라라와복래 또한 벅찬 감동으로 이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그림들은 인터넷 아트 갤러리인 hanga gallery(http://www.hanga.com)에서 스크랩했으며, 그림 설명은 주로 위 책에 실린 엘리자베스 키스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 전합니다(큰따옴표로 처리). 무단 전재하여 저작권자에게는 죄송하지만, 이 책이 더욱 많은 독자들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책 소개는 글 말미에.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ㆍ을밀대ㆍ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다음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 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로버트슨 스콧 지음 l 송영달 옮김 l 책과함께 l 2006-02-06

무릇 책이란 돌려 읽고 놓아 주어야 할 때는 놓아 주어야 한다는 게 평소 라라와복래의 지론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같은 책입니다. 누군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되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하게 될까봐 차라리 한 권 따로 사서 선물할지언정 선뜻 빌려주지 않을 것 같네요~~

엘리자베스 키스와 로버트슨 스콧 자매의 <Old Korea>를 완역한 이 책은 키스의 그림과 여동생 스콧의 기행문으로 구성됐습니다. 이 책에 실린 키스의 그림은 비록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畵) 분위기가 나지만, 한국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과 풍광을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해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마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고 할까요? 이처럼 이 책은 화집으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그린 생활사 복원의 역할도 맡고 있으며, 이 책이 독자들을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키스의 여동생 스콧의 기행문은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스콧 역시 단순히 사람과 풍속, 풍경 등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조선 현실을 상세하게 보고하는 한편 일제의 야만적 지배에 대한 분노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잠시 글을 소개합니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

배유안 지음 l 책과함께어린이 l 2008-12-05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 인내와 복종이 제2의 천성이 된 듯하다. 하지만 온순하기만 한 한국 여자들에게도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있다. 가령 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강요한다든지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 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들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한국 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하는 것뿐이다.”

"학교에서 루스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다. 기품이 고고한 얼굴이었고, 치아는 하얗고 뺨을 불그스레했으며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넘친 표정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 또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말했다. (…)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흑갈색의 옷에다 조개 모양의 삐죽한 짚으로 된 모자(용수를 가리킵니다)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이처럼 자매의 글과 그림은 한결같이 조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으며,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의 따듯함과 의젓함을 저버리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을 경탄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을 만나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옮긴이 송영달 선생의 노고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전적으로 송영달 선생 혼자만의 노고로 세상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1962년 유학길에 오르며 한국을 떠난 후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정치학ㆍ행정학 교수로 30여 년간 근무한 후 은퇴했는데, 우연히 엘리자베스 키스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자료를 수집한 그의 고군분투가 눈물겹습니다.

참, 같은 출판사에서 학생용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도 출간하였는데, 동화작가 배유안이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주제별로 나누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내놓은 책으로 이 또한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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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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