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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끄는 육필 친일파 명단. 이날 고인의 120세 생일을 맞이해 열린 강연회 현장에서는 김승학 선생이 직접쓴 친필 사료들 몇 점이 공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갱지에 흐릿한 붓으로 쓴 ‘반민족특별재판소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사료였다. 그 뒷장에는 ‘친일파 군상’(群像)이라는 중간제목 아래 ‘(1)정계·관계·실업계 인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고 친일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친일파 명단 아래에는 옛날 시골 학교에서 반장선거 때 했던 방식대로 ‘정’(正)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많은 경우는 ‘正’자 셋, 즉 15부터 ‘一’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 육필 원고는 반민특위와 친일파들의 명단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숫자를 부기한 친일파 명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원고 작성 당시 김승학의 지위때문이었다. 김승학은 친필 명단 작성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원고는 김승학이 당시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단순히 개인 의사로 기록한 명단이 아니라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판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끈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견해 김승학은 1948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정치부장에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정 주도 정당이었으므로 김승학은 임정 내의 위치로 보나 한국독립당 내의 위치로 보나 당시 독립운동가 진영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등이 합당해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주류이자 임시정부의 집권당이었다. 환국 후인 1946년 4월에는 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 합당했으나 당명은 여전히 한국독립당이었고, 역시 임정이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좌우 합작과 남북협상 통일정부 수립 등의 노선을 갖고 있었으므로 1948년 5월10일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는 불참했기 때문에 의회에는 일부 무소속 외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심지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게 하는 데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시기 많은 고난을 겪었던 김승학도 1948년 3월 신탁통치 반대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정도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굴절되어 있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모습은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통탄해 마지않던 바였다. 그러나 비록 한국독립당의 선거 불참 속에 구성된 국회지만 제헌국회는 개회 벽두부터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1948년 8월5일 국회의장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金雄鎭)의원(파주. 무소속) 의원 등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의 구성안을 긴급동의해 재적 155명의 의원 중 가 105, 부 16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다음날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에 김웅진,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이 선출되었고, 8월17일에는 김웅진 의원 외 27인의 이름으로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제출돼 9월7일의 제59차 본회의에서 재적 141인 중 가 103, 부 6표로 가결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48년 9월 3일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반시킬 때가 아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폭발적 반응에 밀려 법안은 9월21일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특별재판부에 국회의원이 포함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배치되는 사법권 침해라는 일부 국무위원의 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됐다. 이렇듯 친일파 숙청 문제가 공론화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결성이 기정사실화되자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임정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단독정부, 단독국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친일파 숙청 문제까지 방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승학의 이 육필 명단이 주목받는 것은 임정측의 이런 필요에 의해 작성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정측의 이런 필요성이 아니라면 김승학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연필로 꼼꼼히 옮겨 적고, 아마도 동지들과 같이 한 것이 분명한 ‘正’표시를 부기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친일파 군상”의 육필 초고 이 육필 명단은 그냥 사장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설치 법안이 공포될 무렵인 1948년 9월, 준비했다는 듯이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삼성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발간 경위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의 편찬자는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이지만 그간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어떤 성격의 조직이고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데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베일에 가려졌던 삼성문화사의 “친일파 군상”이 김승학의 육필 명단을 기초로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책은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이는 책이 반민특위를 겨냥해 출간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인물들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받아야 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사는 당시 김승학이 임정과 한국독립당 내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로 볼 때 단순한 개인 의사가 아니라 임정측 입장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임정 측의 입장이 반영된 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당시 한독당 김구 주석은 물론 임정계열의 여러 핵심 인사와 면밀한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친일파 군상’의 초고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이 육필자료는 김구와 임정계열의 친일파 청산 의지와 방법론, 청산 대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정은 비록 단독정부와 단독국회는 거부했으나 임정이나 한독당 명의 대신 ‘민족정경문화연구소’ 명의로 반민특위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육필 명단에 친일파뿐만 아니라 이들 신상을 처리할 재판관, 검찰관의 명단까지 적어 두었다는 점 때문에 신빙성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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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국회 프락치사건까지 겹치자 극도로 위축된 국회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던 반민법 공소시효를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상덕 위원장 이하 전 위원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 뒤를 이어 평소 반민법에 반대해온 이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 임무는 법원과 검찰로 이관되었다. 검찰과 법원은 실형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 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재심청구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한명도 없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鼠一匹)’도 아닌 ‘서무필’(鼠無匹)로 끝난 민족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
※ 참고자료. ※ ※ 정계. 관계. 실업계 인물. ※ 이성환,이수우,윤치호,김연수,고원훈,신태악,조병상,여운홍, 인정식,박희도,이각종,김한경,김시권,박인덕,이정섭,김사연, 문명기,한상룡,정교원,차재정,이성근,박흥식,박춘금,안인식, 한규복,이종린,최린,최남선,박윤진,이돈화,장덕수,방응모,김석원, 김동원,가명 박정형, 가명 정방오, 김신석,손영목,고일청,차재명, 문덕상, 박상준,김오성 참고;김연수(인촌 김성수 동생), 여운홍(여운형 동생) 43명. ※ 언론계. 문학계. 연예계 인물. ※ 김기진,박영희,정인택,이희적,이광수,주요한,김동환,김동인, 모윤숙,현영섭,백철,장혁주,이찬,김용제,최재서,이석훈,정인섭, 최승희(무용),오정민,김정의,박경조,김용환,이용설,홍해성, 유치진,김태진,박영호,이익,안석주,안종화,최인규,박기채, 방한준,서강백,홍양명,고승제,안함광,김억,이창수,이서구, 노천명,배상하,이영근,대조실신,송영,박순천 45명. ※ 교육계. ※ 정남수(목사), 김활란(이대총장),장면(총리),허하백, 신흥우(목사),이헌구,이숙종,오긍선,양주삼(목사),유억겸, 유진오,송금선,황신덕,임국재,손정규,유각경,홍순원,고봉경, 김성수(동아일보사주). 19명 기타. 김정식,김선영,남기동,김용진,박영덕,이정수, 임영신(중앙대창설 초대 상공장관),노기환,김희영, 박휘언,이하영 11명.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조사활동 끝에 확정지었다는 친일파 99인의 명단이다. <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more? Click here! < 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
< 桐千年老恒藏曲 梅生寒不賣香>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63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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