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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한류의 원조))동이족에 대한 중국 기록들과 외국 학자들이 말하는 동이족

동이인(東夷人)들처럼 행동하면 복(福)을 받는다.

 

 

 

 

군자불사지국( 君子不死之國)

 

 

 

- 펀 -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한민족(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합니다.

"동쪽에 사는 사람들" 이라하는 뜻입니다.

중국 후한시대에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 하는 책은,

한자의 근본 원리를 해설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문사전'으로

한자 해석에 있어서 말하자면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책인데

그 책에서 "동이(東夷)" 자를 찾아보았습니다.

( 동이(東夷)는 한민족)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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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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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하면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라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가 있다. (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 싶다." 하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한다.

참으로 연유(이유)있는 일이로다." 라는 구절이다.


(주: 위의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나라 = 고조선

공자의 나라는 중국 동해안에 있었으니 배를 타고 오면 바로 한국의 서해안.)


이제까지 우리는 동이(東夷)민족이라 하여

夷(이)자를 "오랑캐 이" 라고만 여겨왔고

동이(東夷)란 동쪽 오랑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자의 근본을 밝히는 <설문해자>를 보니

이(夷)는 "크게 어질다"는 뜻으로 되어 있고

군자불사지국(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으로 불려지고

공자께서도 중국 땅에 도가 행해지지 아니하므로 동이 (배달) 나라에 가고싶다고 하며 뗏목에 올랐다는 구절이 있다.


더구나 이것이 우리나라 책도 아니고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는 중국의 <설문해자>에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동방예의지국(동방의 예禮와 의義의 나라)>이란 말이 나온 것이며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한 전설이 있는 것이리라.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 군자의 나라가 있고 죽지 않는 백성이 있다.(有君子之國有不死民)

 

 

이라 되어 있고

[후한서 동이전(後漢書 東夷傳)]에는

-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仁而好生), 군자가 있다.(有君子)

[논어 공야장편 자한지리(公冶長篇 子漢地理)]에는

<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外 故 孔子曰 悼道不行 設文解字 欲居九夷 有以也>

즉,

"동이(東夷)는 천성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설문해자]에 나오듯이 구이(九夷)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참으로 연유(이유)있는 일이로다"

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동이민족을 다른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전사년(錢斯年)이라는 사학자는 "팔괘"를 만든 태호 복희씨가 동이(배달)민족으로

팔괘가 한자의 기본이 되었으니

한자는 동이문화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공이전(孔夷傳)에도

<동이(東夷)의 행동은 복이 내린다.>고 나와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동이(東夷)"라는 말이 "동쪽 오랑캐"로 전락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참으로 통탄할 일인 것이다. 아마도 일제와 친일사학자에

 

의해 왜곡되었지 않나 생각이든다..

이제는 다행이 열린 시대가 되어 국경을 초월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동이(배달)민족의 우수성이 밝혀지리라 본다.


- <대동이와 한자문화권> 에서 퍼서 간추림 -

 

 

 

 


《설문해자》의 동이(東夷)


(동이(東夷) = 배달민족 = 한민족)


( 설문해자 - 중국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한문사전"으로 불린다.

한문 사전 중 말하자면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고 하는 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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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의 동이(東夷) 원문

 


<夷>

【東方之人也 從大從弓】

各本作平也從大從弓東方之人也淺人所改耳今正
韻會正如是羊部曰 南方蠻從筮 北方狄從犬
西方羌從羊 西南人焦僥從人
蓋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從大大人也
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夏者中國之人也
從弓者肅愼氏貢 矢石 之類也
出車節南山桑柔召旻傳皆曰夷平也
此與君子如夷
有夷之行降福
孔夷傳夷易也同意夷卽易之假借也
易亦訓平
故 夷爲易也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節南山一詩中平易分釋者各依其義所近也風雨傳曰夷悅也者平之意也
皇矣傳曰夷常也者謂夷卽 之假借也凡注家云夷傷也
者謂夷卽痍之假借也周禮注夷之言尸也者謂夷卽尸之假借也尸陳也其他
訓釋皆可以類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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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설문해자경 說文解字經》段玉裁 著. 대만(臺灣) 蘭臺書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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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夷(이)] 는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대 - 위대함)' 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궁 - 활)'에서 유래하였다.


만물(모든 것)은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이(東夷)만이 대(大)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인(東夷人)의 풍속은 어질고,

어질면 장수하므로

동이(東夷)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 (君子不死之國) 가 있다.

생각컨대,

하늘은 크고 존귀하며 땅도 크고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 존귀한 것이다.

"크고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이(夷)"자의 옛 글자는 "大"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렇듯이 군자(君子)는 동이인(東夷人)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此與君子如夷]

동이인(東夷人)들처럼 행동하면 복(福)을 받는다. [有夷之行降福]

 

진리를 뜻하는 易(역 또는 이)자는 夷(이)자에서 나온 같은 뜻의 글자다. [夷卽易之假借]

 

 

동이인(東夷人)들이 진리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중국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동이(東夷)에 가고 싶다." 고 말하면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간 것은 참으로 이유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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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놀라운 기록이지요.

 

한민족(배달민족)을 존경하는 중국 고대기록들은 아래 계속 됩니다.

 

 

 

 



[고조선 지도]

 

 

 


 

 

 

 

[고조선지도]

 

 


[산해경(山海經)] - (고)조선 관련 기록


( "산해경"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중국의 책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아주 유명한 책.

약 4천2백년전에 지어진 책으로 추정되고 있음.

고대사 학계에서는 산해경 모르면 말하자면 '간첩' )

 

 



"동해의 안쪽과 북해 부근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조선" 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남을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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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其人水居?人愛之]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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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동해"는 중국의 동해 즉 황해(우리의 서해)를 뜻함.

여기서의 "북해"는 황해 위쪽의 바다 즉 발해.)


 

" 군자국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는데

항상 옷을 바르게 차려 입고 관(멋진 모자)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닌다.

가축을 키우고 두 마리 큰 호랑이를 옆에 두고 부린다.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무궁화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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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君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동경(海外東經)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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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전》서문


후한서 - 중국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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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 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

 

故天性柔順, 易爾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故孔子欲居九夷也.
《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山海經》又曰: [不死人在交脛東 壽不死.] 吊方也.

 

《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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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 사람을 "이(夷)"라 한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의미이고,

동이인(東夷人)들은 어질고 생명 살리기를 좋아하여

마치 만물이 대지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훌륭하여 도덕(道德)이 펼쳐지기 쉬워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 - 군자가 있어 죽지 않는 나라) 라 불리워지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 = 동이(東夷) = 한국)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에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키우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호랑이)을 곁에 두고 부린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라고 하였다.

《외국도 外國圖》에 이르기를

 

 

"낭야에서 삼만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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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열전*


약 2300년 전, 공자(孔子)의 7대손 공빈(孔斌)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대의 동이(東夷)는 한(韓)민족 (배달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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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 = 고대 한국)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나라들. 합쳐서 고대 한국.)>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배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 이라 하는 도에 통한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중국의 시조라 불리는) '황제헌원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서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의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의'에 동이(고대 한국)의 '부루'께서 친히 와주셔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졌다.

동이인 '유위자'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분에게서 '중국'이라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동이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 (東方禮儀君子之國 - 동쪽에 있는 예의바르고 의(義)를 아는 군자의 나라) 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東夷)땅 (고조선)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이(東夷)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 사람들 (大國人) 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왕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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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열전 원문 한문본]

 



《 東夷列傳 全文 》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록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2006-09-08 17:50:30

내용출처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AE&sch_key=key&sch_word=주은래&seq=6188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2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저우언라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연합뉴스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제발 우리 정부가 더이상 '굴종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저우언라이 문건' 전문을 싣는다.

◀ 저우언라이 발언록. ⓒ연합뉴스

 


원문 보러가기>>>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AE&sch_key=key&sch_word=주은래&seq=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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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글 : 오소운 목사

 

 

 

▶ 들어가는 말 ◀

 

 

중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하여 박치기 전법으로 유명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문자(文字, 소위 漢字)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이 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가

 

아시아의 동방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것으로 동이족이 한(韓)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기네 조상이라고,「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네들이 역사왜곡을 한다 해도, 자기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가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실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 장개석(蔣介石)과 임어당(林語堂):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의 고향이 옛날 백제땅이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 설명> 왼쪽이 장개석, 가운데가 그의 부인 송미령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어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蚩尤挽歌

 

- 苗族 傳統 口傳 歌謠 -

 

- 오소운 역 -

 

 

千古奇才横空贤,천고기재 횡공현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 #40644;间。가담병론 염황간 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오병형법 군시점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석권중원 하화련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강의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영명불인 탁록패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 #40092;。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 #8212;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4) 임혜상(林惠詳) 교수 :

 

 

홍콩대학의 혜상(林惠詳) 교수는《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5)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 :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 #8212;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 #8212;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6) 대만학자 노간(勞幹) :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7) 중국학자 필장박(畢長樸) :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 #8212;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8) 일본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9)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 :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0) 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고르프 :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印)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 모두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