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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일본 고대사의 골격은 곧 가야사 = 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2)

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2)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2001년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대가야 최후의 왕자, 월광은 어디로 갔나' 편의 장면.

(전편에 이어 계속)
領土국가로의 발전

 

 

고령읍 반운리에서 발굴된 半路國 시대의 굽다리 쇠뿔 손잡이 항아리. 높이 40.5cm. 계명大 소장.
「日本書紀」는 「任那」라는 말을 가야(加耶·加倻·伽耶·伽倻·加羅)諸國 전체를 가르키는 용어로 왜곡하고 있다. 加耶諸國이라는 것은 백제와 신라에 통합되지 않고 옛 弁韓 지역에 자립성을 보유한 채 할거하던 小國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임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임나는 가야제국 중 하나인 金官國(금관국: 駕洛國)의 별칭이었다. 금관국과 安羅國(안라국: 지금의 경남 함안군) 등 남부 가야제국은 倭와 鐵鋌(철정)의 교역 등에 의해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大加耶가 가야 諸國(제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과 관계 깊은 사건은 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의 경자년(서기 400년) 남정이었다.

가야-倭(왜) 연합군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린 신라의 내물왕은 광개토왕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낙동강 방면으로 남진시켰다. 당시 동북아 세계의 최강인 고구려군은 가야-왜 연합군을 강타해 신라 國都(국도) 서라벌의 애움을 풀면서 낙동강 하류 유역까지 추격전을 감행했다.

고구려의 출병 목적은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백제를 배후에서 압박·고립시키고, 왜군의 진출을 봉쇄함으로써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락국)는 가야제국 내의 지도적 위치에서 추락했다. 금관가야의 대성동고분군에서 王級(왕급) 무덤이 4세기 말까지 축조되다가 5세기 이후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대가야의 금귀고리. 지산동 45-1호 석실. 길이 6.9cm. 경주박물관 소장.
이로써 큰 타격을 입은 금관가야의 잔여세력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 산간지대로 흩어지거나 일본 규슈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 冶爐(야로)의 철과 기름진 농토를 기반으로 서서히 성장해 가던 대가야가 도약의 轉機(전기)를 맞았다. 금관가야 세력의 일부가 고령 지역에 유입됨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교역과 제철 지식이 전수되어 국력이 급성장해 「대가야」를 일컫게 된 것이다.

5세기 대가야의 성장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이 금동관은 판 모양의 솟은 장식 1매를 이마 쪽 정면에 배치한 光背形(광배형)이며, 형태상으로 신라의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새날개 모양(鳥翼形) 장식과 달리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이다. 이런 금동관을 만들고 무덤에 부장시켰다는 것이 이미 대가야가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5세기 초엽 이후 대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서서히 외부로 전파되기 시작해 5세기 중엽부터는 합천댐 상류 지역인 반계제 일대를 지나 거창·함양을 거친 후 전북 남원까지 미치고 있었다.

김세기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는 5세기 후반부터 이진아시 王系로 왕위가 세습되고, 왕족이나 왕비족 계통의 旱岐(한기)층과 대왕 직속의 上首位·二首位 등으로 분화된 관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고령·합천·의령·거창·함양·산청·하동을 잇는 권역을 직접지배 지역으로, 진주와 남원의 아영·운봉 지역을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직접지배 지역은 2부체제로 편제해 상부는 원래의 가라 영역인 고령 지역을 상부로 하고, 나머지 지역을 하부로 편제했다. 상부는 연조리 왕궁을 중심으로 上加羅都(상가라도)가 되고, 하부는 玉田(합천군 옥전면) 성산리를 下加羅都(하가라도)라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倭王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下位

 

 

대가야의 철제 투구. 챙이 달린 것이 특색이다. 높이 19.0cm. 지산동 1-3호 출토, 영남문화재연구원 소장.
442년, 대가야는 금관국 등 남부 가야지역의 세력과 연합한 倭(왜)의 침략을 받자 백제와 연합해 대항했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도 계속되어 475년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漢山城(한산성)을 공략당한 백제는 개로왕이 참살됨으로써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이때 신라는 원군 1만 명을 북상시켜 구원에 나섰지만, 이미 백제의 都城(도성)이 함락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로써 漢城백제 시대가 끝나고 公州로 피란한 文周王(문주왕)에 의해 熊津百濟(웅진백제) 시대가 개막된다.

이것은 백제와 동맹관계이던 대가야에는 위기였던 동시에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굳히는 기회이기도 했다. 479년, 「가라국왕 荷知(하지)」는 중국 남조의 濟에 사신을 파견해 「輔國將軍(보국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보국장군이란 칭호는 3품 관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약 50년간 대가야는 領土國家(영토국가)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렸다. 남조의 濟에서 고구려왕이 받았던 장군호는 驃騎大將軍(표기대장군: 480년), 왜왕 武는 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 479년)이었고, 502년 남조의 梁으로부터 백제왕은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 왜왕은 征東將軍이란 將軍號(장군호)를 받았다(신라는 南朝에 조공하지 않았다).

장군호의 순위는 驃騎大將軍→표기장군→車騎大將軍(거기대장군)→거기장군→征東대장군→정동장군→鎭東대장군→진동장군→安東대장군→안동장군의 순이다. 여기서 필자가 굳이 「非行天子가 횡행하던 하루살이 정권」의 남조 왕조에서 부여한 장군호까지 들먹인 데엔 까닭이 있다.

明治 이래 일본의 학자들이 왜왕 武가 478년 남조의 宋으로부터 받은 「使持節(사지절), 都督(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 諸軍事(제군사), 安東大將軍, 왜왕」이라는 칭호를 소위 任那日本府說(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이 칭호에서 「使持節」, 「都督… 諸軍事」는 군사지배권에 관한 것이다. 군령위반자에 대한 처벌에 관련한 「사지절」은 使持節·持節·假持節(가지절)이라고 하는 3등급 중 최상위이며, 황제의 군사대권의 위임에 관한 도독도 도독·督·監의 3등급 중 최상위에 해당한다. 이 군사지배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 신라·가라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秦韓(진한)은 辰韓, 慕韓(모한)은 馬韓인 것으로, 신라와 백제에 의해 이미 병합된 지역이거나 아직 통합되지 않은 지역이다.

약 250년간 다섯 개 왕조가 뒤바뀐 南朝 시기에 주변국의 왕들에게 부여한 칭호를 검토한 사카모토 요시다네(坂元義種)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칭호에 기재된 지역명은 반드시 실제로 군사지배가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都督河西諸軍事(도독하서제군사)」의 칭호를 보면, 423~444년에 걸쳐 河西王에게 부여되었지만, 동시에 432~520년에는 土谷渾王(토욕혼왕)에게, 다시 476~505년에는 宕昌王(탕창왕)에게도 수여되었다.

칭호는 기본적으로 신청자의 희망대로 부여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멸망당하는 바로 그해의 남조 宋으로부터 받은 왜왕 武의 칭호에 국제적 信認度(신인도)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장군호에 있어서도 왜왕 武는 남조 宋으로부터 安東大將軍, 1년 후인 479년 濟로부터 鎭東大將軍, 502년에는 征東將軍을 받아 한 단계씩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왕은 같은 시기의 고구려왕보다는 몇 단계나 낮아 비교의 대상이 아니고, 백제왕보다도 항상 1~2등급 아래에 랭크되었다.



「任那 부흥회의」의 주도국은 百濟

 

 

대가야의 토기. 박물관 고장은 뚜껑 있는 긴 목 항아리. 대가야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이 시기에 대가야는 어떤 외교를 구사했던가. 漢城백제를 멸망시킨 고구려가 남하의 압력을 강화해 신라와의 대립이 심화되면 대가야국은 신라를 구원해 고구려와 싸우는 등 독자외교를 전개하면서 주변 諸소국과의 동맹을 진행시켰다.

嘉悉王(가실왕)은 12현의 가야금을 만든 우륵에게 12曲을 짓게 했다. 이 12곡은 여러 小國의 노래를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며, 대가야연맹의 집회 때 연주된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의 정세는 크게 요동친다. 신라에서는 500년 智證王(지증왕), 514년 법흥왕이 즉위해 급속한 발전을 이끈다. 한산성을 잃은 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겨 부흥한 백제는 501년 무령왕이 즉위해 아직 자립성을 보지하고 있던 榮山江(영산강) 유역 지방에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513년 가야 서부에 진출해 己汶(기문: 전북 남원) 帶沙(대사: 경남 하동)를 점령했다.

이러한 백제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대가야의 異腦王(이뇌왕)은 522년 신라와의 연휴를 꾀해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신라는 북부의 대가야와 결혼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남부의 금관가야 등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위기에 빠진 금관가야 등 남부 가야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왜는 군대를 파견하려고 했지만, 527년 츠쿠시(筑紫: 北규슈)의 國造(쿠니노미얏코: 지방장관) 이와이(磐井)가 古代일본 최대의 반란을 일으켜 왜군의 한반도 출병을 저지했다. 이와이는 加羅 출신의 親신라계 호족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冠帽. 높이 19.1cm. 합천군 봉산면 반계제 가A호 출토, 중앙박물관 소장.
529년,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는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한편 이와이의 반란을 진압한 왜는 오미노케노(近江毛野)를 장군으로 삼은 원정군을 파견, 安羅國(안라국:경남 함안)에 주둔시켰다. 安羅는 다시 백제에도 출병을 요청해 백제군도 진주했다.

그러나 532년, 드디어 금관가야는 仇亥王(구해왕)이 항복해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신라와의 결혼동맹이 깨져 경계심을 갖게 된 대가야는 安羅 등 남부 가야제국 및 백제·왜 등과의 연휴를 강화했다.

이 대목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실은 「日本書紀」에도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보다 8년 전에 저술된 「古事記(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日本」이라는 호칭도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倭府」, 「倭臣」 따위였을 것이다.

그것의 실상은 安羅에 주둔하는 오미노케노 및 그에 부수된 使臣 등을 가리키며, 그 어떤 경우에도 장기에 걸쳐 식민지 지배기관일 수는 없다. 이것을 짐짓 영속적인 지배기관인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日本書紀」에 소위 「임나일본부」의 활동으로서 기록된 것이 541년 및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任那부흥회의」이지만, 이 회의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열린 것으로 이니셔티브를 행사한 것은 물론 백제였다.



멸망에 이르는 길

 

 

舊지산동 39호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고리칼(環頭大刀: 길이 30.3cm). 중앙박물관 소장.

가야를 먹으려 했던 상황은 백제와 신라의 경쟁으로 좁혀지지만, 한동안 그것이 표면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북방으로부터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551년,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진세를 꺾고 한반도 중부지역으로부터 고구려를 몰아 냈다. 이때 백제는 475년 이래 고구려에 빼앗겼던 옛 수도 한산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 6개郡을 탈환했고,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상류 10개郡을 획득했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古代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한강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한강 유역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와 같은 대결을 예상한 백제의 聖王(성왕)은 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의 동맹관계를 심화시켰다. 신라의 팽창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가야도 백제와의 동맹정책을 굳혔다.

433년 이래 120년간 지속되어 오던 신라-백제의 對고구려 동맹을 먼저 깬 것은 신라였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한강 하류 6개郡을 급습해 횡탈했다.

백제는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백제 聖王은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일단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백제군과 고구려군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聖王이 신라를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眞興王(진흥왕) 시대의 신라군은 백제군 단독으로서는 승전을 기대할 수 없을 만한 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백제 聖王의 책략도 녹록지 않았다. 「三國史記」 성왕 31년(553) 겨울 10월 조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과 거의 동시에 聖王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보내고 있다. 비수를 숨긴 위장평화 공세라 할 만하다.

554년, 백제-대가야-왜 연합군과 신라군이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군)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신라 정벌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왕자 餘昌이 진중에서 갑자기 병을 얻었다. 聖王은 아들을 걱정하여 불과 50騎를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관산성으로 달려가다가 중도에서 신라의 복병에 생포되어 참수당하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대가야-왜 연합군 2만9600명이 참살당했다. 왕자 餘昌과 장수 몇 명만이 한 가닥 혈로를 뚫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왕자 餘昌은 백제 25대 威德王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승전한 신라는 대가야에의 공격을 본격화했다. 드디어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대가야와 연합했던 여러 소국도 병합했다.



일본 古代史의 골격은 곧 加耶史

 

 

「大王」이라 쓰인 뚜껑 있는 대가야의 긴 목 항아리. 높이 19.6cm. 충남大 소장.

6세기 중엽까지의 일본 古代史에서 加耶史가 빠지면 空虛(공허)하다. 그런 만큼 失傳(실전)된 가야사는 일본 史書의 비판적 검토로 일부의 복원이 가능하다.

일본의 最古 역사서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神代篇(신대편)에 등장하는 「일본 열도 창조의 女神(여신)」은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이다. 「일본 신화 속의 最高神 아마데라스(오미카미)를 비롯한 수십 명의 神들이 머물렀다는 곳이 高天原(고천원: 다카마노하라)이다.

高天原이 일본 땅의 어디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인에게 何等(하등)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원로 학자가 「高天原은 경상북도 高靈」이라는 논문과 답사기를 썼다면 관심거리이다.

고령을 高天原으로 比定(비정)한 츠쿠바(筑波) 대학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 교수의 논문 「高天原의 故地」 일부를 요약해 소개한다.

< 天孫이 高天原을 떠나 (규슈로) 남하한 것은 대가야 성립 이전인 기원 1~2세기경의 일인 것으로 본다. 天孫 일행은 적지않은 인원을 거느린 조직이었을 것인 만큼 당시 상황으론 舟行(주행)이 가장 안전하고(他집단으로 습격받는 일이 적고), 또한 집단으로 이동 가능한 방법이었을 터이다. 따라서 天孫 일행은 배를 타고 낙동강 하류로 내려와 여기서 海路(해로)로 남하했을 것이다. 이어 가사사노미사키(笠沙御前)를 목표로 항행해, 그 곶(岬)이 바라보이는 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대가야의 그릇받침. 지산동 30호 출토.
기원 1~3세기의 한반도는 三韓시대였다. 당시 고령 지역에 있었던 가야系小國의 이름은 半路國(반로국)이었다.

「天孫」 니니기(노미코토)가 반로국에서 출항할 때 아마데라스는 거울·곡옥·검 등 소위 「3종의 神器(신기)」를 주면서 『아시하라(葦原)의 땅은 나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할 땅이다. 나의 자손이여, 어서 가서 잘 다스려라. 그곳의 運은 하늘과 땅이 붙을 때까지 융성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면 왜 니니기 일행은 한반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北규슈에 상륙하지 않고 굳이 南部 규슈까지 내려가 상륙했을까? 원로 언어·역사학자 朴炳植옹은 『北규슈에는 「天孫」 니니기보다 먼저 도래한 가야족들이 이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사사노미사키의 뾰족한 곳이 바로 보이는 아다나가야(吾田長屋)에 배가 닿자 니니기는 모래밭에 폴짝 뛰어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제1성을 올렸다고 「古事記」에 기록되어 있다.

< 이곳은 가라구니(韓國)와 마주보고, 가사사(笠沙)의 뾰족한 곳이 바로 보이며, 아침 해가 直刺(직자)하고, 저녁 해가 끝까지 비추는 곳이어서 매우 좋은 곳이다>



일본 황실의 고향을 둘러싼 양론-고령說과 김해說

 

 

고령읍 가야大 구내에 건립된 日本天皇의 고향을 밝히는 石碑「高天原故地」.

일본 천황가의 出自(출자)가 가야임은 韓·日 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東京大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그의 「騎馬民族 日本征服說(기마민족 일본정복설)」에서 천황가의 先祖(선조)가 夫餘系(부여계)라고 했지만, 실은 가야 출신임을 의식하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高靈 출신」과 「金海 출신」으로 엇갈려 있다.

首露王을 시조로 삼는 「김해김씨 世譜(세보)」에 의하면 『거등왕 원년 기묘년(199년)에 왕자 仙이 세상이 쇠하는 것을 보고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乘雲離去)』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일제시대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해김씨 世譜」의 반포를 금지시켰다. 역사가 故 千寬宇(천관우) 선생은 김해 지역 주민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은 한국 측 자료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김해김씨 璿源譜略(1914년 金龍奎편)」은 큰 시사를 준다고 지적했다.

< 『수로왕과 왕비 許씨의 사이에 10子가 있었다. 장자는 태자(居登王)요, 二子는 왕후의 姓을 따라 許씨가 되고 七子는 厭世上界(염세상계)하고…. 居登王(거등왕)의 아들 仙은 塵世(진세)가 쇠함을 보고 神女와 함께 乘雲離去하였다』

이 세보에서 이와 같은 전승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으나 大姓(대성)인 김해김씨들이 이 전승을 조작할 까닭이 없을 것이고 보면 이 전승은 오랜 유래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전승에서 나오는 厭世上界, 乘雲離去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본 천손강림 설화가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설화와 놀랍게도 비슷하다. 니니기가 구름을 헤치고 내린 곳은 쓰쿠시의 쿠지후루(혹은 소호리)인데, 그 자손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황족이다>

그러나 마부치 교수는 두 번의 답사를 통해 니니기의 出自가 고령임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 나처럼 간토(關東) 평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니니기가 상륙한) 평야를 보고 그처럼 감탄하지 않았을 것이다(니니기는 「아침해가 바로 쪼이고 저녁해가 끝까지 비춰 주어 좋은 곳」이라는 상륙 제1성을 터뜨렸다. 이 말을 해석해 보면 天孫(천손: 니니기)은 가야국 중에도 산골짜기 혹은 분지에서 살다가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인터뷰 - 가야大 李慶熙 총장



「日本皇室의 고향」이라는 碑가 세워져 있는 가야大

 

 

가야大 예술대 工房을 견학한 필자에게 도자기 제작 공정을 설명하고 있는 李慶熙 총장.
지난 2월15일 오후 2시의 약속시간에 맞춰 고령읍 지산리 산 120번지 가야대학교의 총장실로 찾아갔다. 휴대전화를 넣으니 李慶熙(이경희) 총장은 『지금 예술대학 工房에 있으니 이리로 오라』고 했다.

李총장은 1999년 가야大 뒷산에 「고령이 일본 황실의 고향」이라는 내용을 담은 石碑(석비)를 세워놓고 매년 4월 「高天原祭(고천원제)」를 주최하고 있다. 高天原祭에는 매년 내국인과 일본인, 수백 명이 참석해 오고 있다.

―李총장께서는 高靈이 「일본 황실의 고향」이라고 주장해 오셨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변한 12개국 가운데 오늘날의 고령 지방에는 미오야마터(彌烏耶馬臺)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오야마터는 BC 1세기경부터 철이 생산되어 그것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농업생산량이 증대되었어요. AD 1세기부터는 미오야마터를 加羅라고 불렀습니다. AD 170년경에는 가라에 살던 사람 일부가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을 지배하고, 정권을 세우고, 스스로를 야마터(大和)族이라고 불렀어요. 모음이 다섯 개밖에 없는 일본어로는 「야마터」로 발음할 수가 없으니까 후대에 이르러 「大和」라 써놓고 「야마토」라고 읽는 것이죠』

李총장은 오는 4월15~20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市에서 열리는 「李慶熙의 한국전통 陶磁展」에 출품할 그릇 제작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가마에 불을 때기 직전이어서 공방 안은 매우 추웠다. 그럼에도 팔순 연세의 그는 필자를 공방의 이곳저곳을 30분쯤 견학시켰다. 이어 총장실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했다. 난방시설이라고는 소형 석유난로 하나뿐이어서 춥기는 매일반이었다.

―李총장의 말씀은 언어학적 연구에 따른 것인데,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까.

『일본 후쿠오카(福岡)大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교수가 최근 「북부 규슈의 야요이(彌生) 문화와 半島系 유물」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발굴된 「한국식 小銅鐸(소동탁)」 및 「한국식 小銅鏡(소동경)」의 원산지가 모두 가야 지방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李慶熙 총장은 필자에게 오다 교수의 논문을 제시했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 1. 한국식 小銅鐸 ― 宇佐市 別府유적

1977년에 발견된 이 小동탁은 일본에서 발견된 한국식 小동탁 제1호이며, 이래 후속자료의 발견이 없는 귀중품이다. 경북 월성군 入室里 유적에서 발견된 제1호 小동탁과 형상·法量에서 모두 닮았다.

2. 한국식 小銅鏡 ― 竹田市 石井入口유적

1981년에 발견된 이 小동경은 경북 영천군 漁隱洞(어은동) 유적 발견의 B群 鏡과 同范鏡(동범경)을 구성하고 있다>

『가라에서는 중국의 銅鏡을 모방해서 倣製鏡(방제경)을 만들었는데, 그 몇 개가 규슈 오이타(大分)현 大竹市 石井入口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小동경은 영천군 어은동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A群 거울과 동일한 鑄型(주형)으로 만든 것이란 얘기입니다』



任那의 뜻은 「임의 나라」

 

 

李慶熙 총장이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설명하면서 天下名品 10가지 중 고려 翡色(비색)청자가 들어간다고 쓰인 自筆을 들어 보이고 있다.
―총장님을 만나기 전에 학교를 둘러보다 뒷산에서 「高天原碑」를 보았습니다. 碑 옆면에 새겨진 「건립 취지문」에는 『이곳이 가야제국의 宗家인 任那가야의 옛 땅이며, 일본문학박사 마부치가 일본 신화 속에 나오는 高天原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디다. 「임나가야」는 우리 학계에선 대체로 김해의 금관가야로 보는 데 반해 일본 학계에선 가야 諸國(제국) 전체로 보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부치 교수는 「임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임」은 주인님 혹은 어머님의 「任」자이고, 「나(那)」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古都 나라(奈良) 역시 한국어의 「나라」인 것입니다. 「임나」란 말은 狗耶(구야)나 加羅 또는 加耶를 고향으로 삼던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우고, 이들이 고향땅을 부를 때 사용한 말이라고 하더군요』

―狗耶라면 김해의 금관가야, 加羅라면 고령의 대가야를 의미하는데, 일본 천황가의 선조를 굳이 고령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령에서 하룻밤을 걸으면 牛頭峰(우두봉)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高天原과 牛頭峰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진 地名(지명)일까? 여기서 일본의 건국신화의 한 토막을 간략하게 소개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일본 신화 속의 최고神 아마데라스의 남동생 스사노(素?鳴尊)는 소년 시절부터 살인·방화를 일삼았다. 누나(아마데라스)가 봄에 종자를 뿌린 농지에 씨앗을 한 번 더 뿌리는가 하면, 가을엔 누나의 밭에 망아지를 몰아 넣어 곡식을 뜯어먹게 하고, 누나의 새 집의 방에 들어가서 대소변을 보고,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고 있는 누나에게 피가 뚝뚝 흐르는 망아지 껍질을 던져 놀란 누나가 베틀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했다.

격분한 아마데라스는 스사노를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면서 天石窟(천석굴: 아마노이와야)에 들어가 돌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이로써 세상이 캄캄해져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高天原의 神들(사실은 마을사람들)은 큰일났다 하며 강가에 모여 어찌하면 「태양의 神」 아마데라스가 석굴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가를 의논한 끝에 이벤트性 계책을 세웠다.

석굴 밖에서 시끌벅적한 굿판이 벌어지자 궁금해진 아마데라스가 돌문을 삐죽 열고 밖으로 내다보았다. 이 순간, 팔힘이 센 神 하나가 숨어 있다가 얼른 아마데라스의 손을 잡고 당겨 석굴로부터 끌어내었다. 「태양의 神」이 석굴에서 나옴으로써 세상은 밝아졌고, 高天原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高天原 사람들은 다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스사노의 추방이 결정되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스사노는 『풍우가 심해 曾尸茂梨(소시모리=쇠머리山=우두봉)에 가기 어려우니 오늘밤만은 이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도롱이(雨衣)를 만들어 입고 밤새도록 걸어 우두봉 밑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살았다.



일본인들이 한국땅에서 「牛頭峰」을 찾는 까닭

 

 

高天原 거주 神들의 계보도가 새겨진 石碑. 고령읍 가야大경내에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경북 고령 땅이 옛 高天原이라는 가능성이 큰 것 아닙니까. 고령 근처인 경남 거창군 가조면 가야산국립공원 안에 가야산의 정상인 牛頭峰이 있거든요. 이 산 밑까지는 고령에서 약 35km 거리인 만큼 옛길을 걸어간다면 하룻밤 사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우두봉」이 몇 개 더 있습니다. 明治 이래 일본 학자들은 한국말의 「소머리」, 즉 牛頭里로 생각하고 한국 전역에서 牛頭里를 찾는 노력을 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朝鮮地名考(조선지명고)」를 쓴 아유가이(鮎貝房之進)에 의하면 明治시대에는 춘천의 우두산을 소시머리(우두리)로 생각하고, 이것에 의문이 생기자 제2차로 부산지방에서 우두산을 찾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도 약점이 발견되자 제3차로 한강 하류 설이 나오기도 했어요.

『1994년 일본 雄山閣에서 발행한 천문학자 와타나베 토시오(渡邊敏夫) 著 「일본·한국·중국의 日蝕(일식)·月蝕 寶典」에는 서기 146년 8월25일 한국 고령 지방 일대는 「金環日蝕(금환일식)」이었다는 연구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마데라스가 天石窟에 들어간 날이 서기 146년 8월25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최근, 在野(재야) 사학자 朴性興(박성흥)옹은 충남 당진군 당진읍 우두리 거북산에 있는 土城을 「소시머리」로 比定해 필자도 현장을 답사한 바 있다. 당진읍의 우두리에는 토성이 두 곳이 있다. 현지에서는 거북산에 있는 토성을 「우두산성」, 봉우리를 「구지봉」이라 하고, 가성산에 있는 토성을 「가성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朴性興옹은 『313년 고구려 美川王의 樂浪(낙랑) 공격으로 중국세력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예산군 大興 지방에 있던 임나국의 미마키宮에서 살면서 농경문화를 지닌 漢系 스진(崇神)왕이 위협을 느껴 김해 방면으로 망명해 일정기간 머물다 규슈로 건너가 일본 天皇家의 실질적 창업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李慶熙 총장과 朴性興옹은 일본 천황가의 선조를 가야계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스사노의 鄕愁

―앞에서 거론했던 스사노는 일본의 2大 건국신화 중 하나인 이즈모(出雲)계 신화의 주인공인 만큼 그의 그 후 행적에 대해 더 언급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두봉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스사노가 그의 아들과 함께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해 바다를 건너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에 건너간 시기는 그보다 7~8년 뒤인 서기 154년경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高天原에서 惡神이었던 스사노는 이즈모에서는 善神으로 변신했다. 그는 머리와 꼬리가 각각 8개나 되는 八岐大蛇(야마다노오로치)를 퇴치하여 민중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원로 언어학자 朴炳植(박병식)옹은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 달린 오로치」를 「여러 명의 괴수가 거느린 많은 오로치族」으로 해석한다. 또 『「오로치」는 당시 일본 동해안 지대에 침입하여 농작물을 강탈해 간 고구려族의 일족인 ?婁(읍루)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스사노도 가끔 「가라국의 나의 고향에는 금과 은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오고 싶다」고 했다. 스사노의 鄕愁(향수)인 셈이다.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은 스사노를 「加耶神」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설립한 대구공업대학 이웃에 있는 가야박물관에는 기원 1~2세기에 가야국에서 생산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10년 전, 시마네縣 이즈모市 사다(佐田)町의 스사노神社를 견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 「스사노館」에는 2세기경 가야국에서 만든 녹이 많이 슬고, 3등분으로 부러진 鐵劍(철검) 한 자루가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것이 가야박물관에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나는 더욱 놀랐습니다. 고령읍 中山里(중산리)에는 초기 가야시대의 土器窯址(토기요지)가 있어요. 格子紋(격자문) 토기는 그곳에서만 구운 것이기 때문에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스사노館」에도 높이 30cm 정도 되는 격자문 토기 항아리 한 개가 유리상자 안에 진열하고 있습디다. 그것과 똑같은 것이 우리 가야박물관에도 진열되어 있거든요』



『고령 땅에선 「三種의 神器」가 많다』

이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초대 천황 진무(神武)의 祖父(조부)로 기록한 니니기미코토(瓊瓊杵尊·以下 「니니기」로 표기함)의 정체에 대해 거론할 차례이다. 니니기는 「일본열도의 창조신」인 아마데라스(天照大神)의 아들과 다카미무스히(高皇産靈神)의 딸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니니기가 고령 출신이라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증거는 아마데라스가 高天原을 떠나는 孫子 니니기에게 소위 「3種의 神器(신기)」를 주었습니다. 그 「3종의 신기」는 고령읍 일대에 있는 고분을 발굴하면 흔히 나오는 유물입니다. 내가 설립한 가야박물관에는 「3종의 신기」와 생산연대가 같은 철검 세 자루, 비취 곡옥 10개, 銅鏡 50장이 진열되어 있어요. 마부치 가즈오 교수는 이것을 보고는 고령이 高天原의 옛 땅임을 확신하더군요』

―마부치 교수는 어떤 분입니까.

『마부치 박사는 일본 츠쿠바(筑波) 대학에서 정년퇴임하고, 쥬오(中央) 대학에서 8년간 일본 古文學을 강의한 원로 학자입니다. 그분에게 배워 한국의 대학교수가 된 사람만 20여 명이나 됩니다』

―마부치 교수와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 「高天原 고지」라는 碑를 세우게 되었습니까.

『1998년 9월, 우연히 내 손에 마부치 교수가 쓴 「高天原 故地」라는 소책자 한권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경북大 대학원 일본문학과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마침 그때, 마부치 교수와 오랜 知面이 있는 경북大 李琮煥(이종환) 교수가 일본 시마네(島根)縣立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어요.

이종환 교수에게 전화를 넣어 「마부치 교수의 高天原이 옛날 고령이라는 학설을 전폭 지지한다. 내가 마부치 교수와 공동으로 高天原 고지라는 石碑를 세우고 싶다. 마부치 교수의 동의를 얻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반응은 어떻든가요.

『이종환 교수가 「마부치 선생과 누차 교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더군요. 마부치 교수의 거절 이유는 「일본에는 칼잡이 국수주의자가 많다. 만약 高天原이 옛날 고령이라는 碑를 세웠다가는 칼잡이가 내 배를 찌를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1998년 10월, 내가 東京으로 건너가 마부치 교수를 만나 「만약 칼잡이가 선생님의 배를 찌르려고 한다면 그 碑는 李慶熙가 세웠으니 李慶熙의 배를 찌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마부치 선생이 「나도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배를 찔려도 좋다」고 쾌히 승락하십디다』

―韓·日의 두 원로 학자가 목숨을 걸고 놓고 비장하게 세운 것이 「高天原 故地」 碑군요.

『나는 경남 산청군 始川面 德山里 강가에서 큼직한 자연석을 구해 와 가야大 고령캠퍼스 안 高天原공원에 세웠는데, 글씨는 東京 成德여자대학 히구치(?口信夫) 교수가 써 주었습니다. 1999년 6월28일 나는 마부치 교수를 비롯해 일본 인사 50여 명과 국내 인사 500명을 초청해 「高天原 故地」 碑 제막식을 열었습니다. 제막식 후에는 우리 대학 대강당에서 마부치 교수가 「高天原의 위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학술강연도 했습니다』

李총장과의 인터뷰는 4시간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는 26번 국도 등을 승용차로 달려 고령군 쌍림면, 합천군 야로면·가야면을 거쳐 海印寺(해인사)의 山門 앞까지 답사했다. 중도에 悲運(비운)의 왕자 月光太子(월광태자)의 전설이 얽힌 月光寺(월광사)에 들를 생각도 했지만, 이미 밤이 깊었다.

月光太子라면 대가야의 異腦王(이뇌왕)이 신라 왕실에 청혼해 맞이한 신라 왕녀(이찬 比助夫의 여동생)과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다. 이때 신라 왕녀는 100명 시녀를 데려왔는데, 시녀들의 간첩활동으로 대가야-신라의 결혼동맹은 파탄나고 말았다.

달빛 아래 月光寺 앞에 얼쩡거린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밤길을 도와 다시 고령군 쌍림면의 숙소로 돌아왔다.


▣ 역사의 진실



5000년 전부터 韓·日 간에 「바다의 길」 열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한반도에 붙어 있던 일본땅이 섬이 된 것은 약 1만 년 전이었다. 약 1만 년 전, 지질학에서 말하는 제4間氷期(간빙기)에 들어오면 기온이 높아져 해수면도 상승해 대한해협과 소야(宗谷)해협과 쓰루가(津輕) 해협이 생겼다.

일본이 섬이 되어 버리면 한반도와 다른 문화가 형성된다. 일본열도는 대륙문화로부터 고립해 있었다고 보여졌다.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이미 명확하게 깨어졌다. 1969년,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으로부터 규슈 지방에서 만들어진 조몬(繩文)토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수년 후엔 對馬島의 코시다카(越高) 유적에서 한국의 櫛目土器(즐목토기)가 출토되었다. 코시다카 유적은 5000년 전 조몬文化 초기에 속하는 유적이기 때문에 그 무렵에 이미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엔 「바다의 길」이 열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후쿠오카(福岡)공항 남서 약 1km. 미카사(御笠)川을 따라 폭 100m 정도의 언덕이 남으로 달리고 있다. 이 언덕의 북측 주변이 일본 최초의 논(田) 유적으로 유명한 이타즈케(板付) 유적이다.

벼농사는 「문화의 영향」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연간을 통해 계획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벼농사의 기술은 간단히 몸에 배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의 시작은 그것이 몸에 밴 인간의 이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韓半島人이 일본에 벼농사를 퍼뜨려

벼농사 농민의 일본 移住 루트에 대해 敗戰(패전) 전의 일본학계에선 중국 강남 → 대만 → 오키나와 → 北규슈의 北上說이 유력했다. 그러나 북상설은 패전 후 부정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 江南 → 한반도 → 북규슈 → 가고시마 → 오키나와로 南下했음이 판명된 것이다.

일본의 벼농사는 기원전 4세기에 한반도로부터의 이주집단이 갖고 간 것이었다. 아무튼 벼농사는 약 100년 만에 아이치(愛知)현까지 퍼지고, 200년 후에는 도후쿠(東北) 지방까지 북상했다.

일본에서 처음 벼농사가 정착했던 후쿠오카의 이다즈케(板付) 남방 약 3km에 스쿠(須玖) 구릉이 있다. 이 구릉에서 수백 개의 옹관과 동검 6개, 銅?(동모) 45개, 銅戈(동과) 77개 등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 무기류는 모두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이었다. 옹관에 死者(사자)를 장사하고, 거기에 청동무기를 넣는 문화는 김해 등지에서도 다수 발견되어 기원 1세기경 한반도 남부와 北규슈 지방이 동일문화권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明治헌법 아래의 일본에서는 「우수한 단일민족(大和民族)論」을 이데올로기化했다. 東京大 교수 세이노(淸野謙次)는 조몬 貝塚에서 발굴된 인체를 계측해 조몬人이야말로 현대 일본인의 직접 선조라고 역설했다. 단일민족론은 패전 후에도 계승되었다. 심지어 진보적 역사가로 알려진 이노우에 야스시(井上淸: 京都大 교수)도 그러했다.

1953년, 시모노세키(下關)市 북쪽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인골이 발견돼 이후 5년간 300여 체를 발굴했다. 이것을 계측한 규슈 대학 가네세키(金關丈夫) 교수는 조몬시대의 인골 및 古墳시대의 인골과 비교해 초기 야요이(彌生)人은 신장으로 보아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조몬人의 평균 신장은 남자 160.2cm, 여자 148.0cm인 것에 비해 초기 야요이人은 남자 163.2m, 여자 151.0cm로서 야요이人이 조몬인(지금의 아이누族)보다 평균 3cm 크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몬人의 얼굴은 폭이 넓고 上下가 짧다. 또한 미간이 높고 융기돼 鼻根部(비근부)가 우뚝하고, 鼻骨(비골)이 높다. 이에 비해 야요이人은 얼굴이 길고, 미간과 鼻根部가 편평하다. 결국 장신에다 미끈한 얼굴 생김이다.

인류학자 오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현대 일본인의 頭骨의 지역차를 분석해 얼굴이 길고 키 큰 집단이 도래해 세토(瀨戶) 內海로부터 기나이(畿內) 지방에 들어와 다시 간토(關東) 지방에까지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서기 700년의 일본 인구, 한반도로부터의 이주자가 80%

일본의 국립 민족학박물관大 오야마(小山修三)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사용해 인구동태를 추계한 바 있다. 그것에 의하면 조몬 後期 일본열도의 인구는 16만 명 정도였지만, 조몬 晩期에는 한랭화와 식량 부족 때문에 기원전 300년의 인구는 7만5000여 명으로 격감했는데, 서기 700년의 인구는 540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서기 700년 인구 540만 명은 기원전 300년 이후 1000년간 年평균 인구증가율 0.4%이 넘어야 가능한 수치이다. 이때까지의 연구로서 보고된 세계 각지의 초기 농경단계 인구증가율은 0.1~0.2% 정도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인구 격증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987년, 東京大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 교수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으로부터 1000년간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渡來(도래)가 없었다면 인구 540만 명에 달할 수 없다는 설을 발표했다. 즉, 인구학·인류학적인 시각에서 서기 700년 현재, 「도래인」과 일본 원주민의 수를 추정해 도래인과 일본 원주민의 비율을 「80% 對 20%」 혹은 「90% 對 10%」라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도래인들은 쌀농사 및 금속기(청동기·철기)의 기술과 샤머니즘 등의 새로운 문화를 가져가 퍼뜨렸다. 일본문화의 여명은 이로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니하라 교수는 도래인들의 국적은 밝히지 않고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인」이라고만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보이는 도래인을 분석해 보면 도래인의 거의 전부가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현대 일본인의 절대다수는 渡來의 시기를 달리하긴 했지만, 在日同胞(재일동포)인 셈이다. 따라서 일본 고대국가史의 진실은 한국인에 의한 일본 개척史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古代 천황과 지배층의 原籍(원적) 역시 加耶일 수밖에 없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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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출처 :날아라! 정대세 원문보기글쓴이 : 뽀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