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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일리야 오스트로우호프 - 서정이 담긴 러시아 풍경

저는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을 아주 좋아합니다.

사실적이면서도 이야기가 담긴 그들의 작품에는 우리의 정서에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우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추상화가 이어지고 그 이후에는 이념이 너무 강조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러시아 미술은 제게는 버거운 것이 됩니다. 19세기 풍경화 부문에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러시아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일리야 오스트로우호프 (Ilya Ostroukhov / 1858~1929)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 속 풍경을 따라 1년 사계를 즐겨 보겠습니다.

 

 

 

 

 

이른    Early Spring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강둑 위로 난 길에도 희미하게나마 초록의 숨결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겨우내 바람과 눈에 시달렸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로 서 있지만 강으로 몸을 힘껏 구부린 모습에서는 봄을 기다리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이런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다. 탐진강 둑길을 따라 이모님 댁에 가는 길이었죠.

그 곳에서 평장 들판을 건너 오던 바람을 맞으며 걷던 때가 떠 오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에 걸었던 길들이 선명하게 머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이른 봄에   In Early Spring

 

봄이 한결 더 가까워졌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는 초록이 짙어졌고 여린 가지들도 잎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늘 맞는 봄이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죽은 것 같은 대지가 다시 살아나 일어나는 모습에 경이로움이 더 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봄이 돌아오면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정도전도 봄맞이 (逢春)라는 시에서

금성산 아래에서 또 봄을 맞으니 (錦城山下又逢春)

올해도 모든 것이 새롭구나 (轉覺今年物象新) 라고 했습니다.

문득 봄은 새롭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로우프가 훗날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한 것에 비하면 그에 대한 자료는 아주 빈약합니다.

몇 안 되는 자료를 가지고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오스트로우호프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러시아 예술가들이 모이던 아브람체보라는 곳이 있는데, 마몬토프라는 사업가가 투자를 한 곳으로

문학가와 화가들이 모여 일종의 예술인 마을이 된 곳이죠. 성장한 오스트로우프는 이 곳에서 화가들과 어울리며 지내게 됩니다.

 

 

 

 

 

초록 잎들   The First Greens

 

가지마다 잎들이 열렸습니다. 노란 꽃을 활짝 피운 나무는 마치 작은 등을 빼곡하게 달고 있는 모습입니다.

강둑은 여린 초록으로 덮였고 그 사이 들꽃들이 보석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봄을 가져온 시내는 고요하게 하늘과 주변의 나무들을 담아 흐르고 있고 멀리 보이는 숲에도 연두색이 가득합니다.

곱고 고운 초록의 잎들, 모습은 여리지만 겨울을 이겨낸 힘을 뿜어 내고 있습니다.

그 기운 때문일까요? 봄은 늘 몸과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아브람체보에서 지내는 동안 오스트로우프는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기록에는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독학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것은 아브람체보에 오기 전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알렉산더 키셀리오프라는 화가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리야 레핀이 지도하고 있던 일요 저녁 드로잉 반에도 나가게 됩니다.

2년 뒤에는 잘 나가는 화가이자 미술 선생님이었던 파벨 치스타코프의 지도도 받습니다.

 

 

 

 

 

한낮의    River at Midday / 1892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한낮, 고요함이 머물고 있습니다.

강 건너 나무는 바람이 흔들고 간 물결 위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고 수련의 꽃들은 마치 흰 종이배처럼 떠 있습니다.

멀리 들판 너머 숲에도 초록의 생명이 가득합니다. 어딘가에서 나지막하게 노래 소리라도 들려 왔으면 좋겠습니다.

강둑에 앉아 이런 풍경을 보고 있는다면 어떤 소리라도 내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거든요.

 

 

 

 

 

오솔길    Alley

 

숲 옆으로 난 오솔길 위, 가로수를 뚫고 햇빛이 붉은 색으로 내려 앉았습니다.

오스트로우프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굵은 텃치로 묘사된 오솔길과 나무들은 마치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뭉쳐진 것처럼 다가 옵니다.

가끔 원미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습니다. 아주 천천히 걷다 보면 늘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됩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볼 때마다 제게 다르게 다가 오는 것들이죠.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많습니다.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될지 늘 궁금합니다.

 

1885, 스물 일곱이 되던 해 오스트로우프는 이동파에 가입합니다. 이동파는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그룹이죠.

그때 당시 러시아의 재능 있는 젊은 화가들이 참여한 이 그룹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대중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러시아 곳곳에서 개최된 전시회를 통해 그들은 미술 작품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1886, 오스트로우프는 모스코바 조형미술학교에서 미등록 학생으로 공부를 합니다.

 

 

 

 

 

가을 풍경   Autumn Landscape

 

가을과 여름이 어지럽게 교차되고 있습니다. 성질 급한 잎들은 노란색으로 변했지만 여름의 마지막을 잡고 있는 잎들은 여전히 초록입니다.

숲 가운데 자리를 잡은 작은 호수에는 햇빛이 가득합니다. 화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풍경 앞에서는 발길을 멈추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 담는 것과 눈으로 담는 것은 다르겠지만 이런 것들이 쌓여 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더디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황금빛 가을   Golden Autumn / 1887

 

처음 이 작품을 보는 순간 혹시 사진이 아닐까 하고 그림을 확대 해 보았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입니다.

가지고 있는 몸 속의 모든 힘을 다 뿜어 내는 것 같은 잎들에게서 문득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은 늘 이렇게 화려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몰과 가을의 단풍을 볼 때입니다.

곧 떨어져 미라처럼 마를 잎들의 모습은 아주 멋진 삶을 살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숲 사이로 난 작은 길 위, 산새도 잠시 가을 속으로 깊게 빠져 든 모습입니다.

 

오스트로우프는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소질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실적인 기법으로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냈는데 거기에 시적인 느낌을 더했습니다.

그의 작품이 사진 같은 정교함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한편으로 오스트로우프는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였습니다.

부유한 집안 환경을 배경으로 그는 러시아 대가들의 작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물려 받은 재산을 쉽게 날려 버리는 2세들에 비해 그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체보 공원에서   In the Abramtsevo park / 1885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자 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가지에 남아 흔들리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을 기꺼이 시작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지난 계절, 많은 사람들이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머리를 정리했을 벤치 위에 낙엽이 내려 앉았습니다.

신발을 덮을 만큼 쌓인 낙엽 위를 걷다 보면 정말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한탄도 있고 환호도 있습니다. 더러는 눈물도 그리고 웃음도 들립니다. 바삭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마음의 보온재로 그만한 것도 많지 않거든요.

 

 

 

 

 

 

Siverko 북풍         Siverko, The North Wind / 85cm x 119cm / 1890

 

구름이 낮게 내려 앉았습니다. 만을 가로 지르는 바람의 끝에 차가움이 묻어 있습니다.

흐린 하늘을 담고 있는 물에는 북풍이 만들어 놓은 잔물결이 가득합니다.

계절이 바뀔 즈음의 하늘은 늘 어지럽습니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과 서둘러 찾아 온 낯섦이 뒤 섞이기 때문이겠지요.

찬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 같은 이 작품은 앞서의 황금빛 가을 (Golden Autumn)과 함께

오스트로우프의 최고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1898년 오스토르우프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운영위원회 멤버가 됩니다. 그리고 1905년부터는 미술관 운영 책임자가 됩니다.

1917,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 발발 이후 러시아 혁명 정부는 오스트로우프가 그 동안 개인적으로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국유화 한 다음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으로 옮깁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었겠지만 보관 장소가 미술관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마지막     Last Snow

 

그 동안 쌓인 눈이 다 녹지 않았는데 다시 눈이 내렸습니다. 양은 많지 않았습니다.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인 것 같습니다.

아직 남은 햇빛을 받고 있는 나무 꼭대기 아래로는 해가 지면서 산 그림자에 덮인 부분들이 푸른색으로 변했습니다.

얼마 후면 푸른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겠지요. 눈이 녹은 곳에는 다시 옅은 초록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길었던 겨울, 다시 초록으로 얼굴을 내민 그들이 정말 고맙습니다.

 

 

 

 

 

아브람체보의 마지막      Last Snow, Abramtzevo

 

겨우내 회색으로 굳었던 붉은 대지의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덮여 있던 눈은 거의 다 사라지고 움푹 파인 곳에 마지막 잔설만 남았습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햇빛으로 땅은 서서히 물러질 것이고 그 틈을 통해서 겨울을 이겨낸 생명들이 숨을 쉴 것입니다.

이제 싹이 돋고 거대한 생명의 시계가 빠르게 움직이겠지요. 겨울이 혹독했기에 봄은 더 눈부신 것 아닐까요?

 

1929, 일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스트로우프는 국가의 소유가 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활동합니다.

그가 평생을 모았던 작품들을 늘 볼 수 있었으니까 불행하다고 만 할 수는 없겠지요.

말년에는 미술 이론가로로 활동을 했고 광범위한 정보를 담은 미술에 관한 책들도 펴냈습니다.

서정이 담긴 그의 풍경화 덕분에 1년을 돌아본 시간이었습니다.